에델바이스 [23]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23
많이 커 보이는 내 하얀 잠옷을 입고 서있는 지유에게 난 소리쳤다.
"질투 안 해! 야, 내가 뭐가 아쉬워서 질투를 하냐?"
"웃긴다."
"아니라니까? 아, 진짜!"
"현중아."
"진지하게 이름 부르지마. 무서워."
"지키고 싶다, 난."
지키고 싶다 라니. 그건 내가 할말이다, 욘석아.
달그락,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 착 붙어서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는 지유.
이 녀석 은근히 볼 때마다 귀엽다니까?
“신기하지?”
“응.”
“너도 해볼래?”
“…”
이건, 무언의 긍정이겠지? 난 이참에 은근 슬쩍 지유에게 설거지를 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끼고 있던 빨래 장갑을 벗어서 지유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빨래 장갑을 보고만 있는 지유.
“왜? 해보고 싶다며?”
“…어떻게 하는 건데.”
“응? 그냥 이걸 양 손에 끼고, 이렇게 스펀지에 거품을 내서 그릇을 빡빡 문질러 닦는 거야. 오케이?”
“…빡빡?”
“그래.”
난 직접 지유의 목에 앞치마를 걸어주고 손에는 빨래 장갑을 끼워주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지유가 설거지를 할 동안, 난 샤워라도 할까?
룰루.
속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향하는 나.
지유가 설거지 하는 동안에 빨리 끝낼 생각으로 욕실로 향했건만,
금새 주방으로부터 들려오는 그릇이 두 동강 나는 소리에 발걸음이 멈춘다.
“쨍그랑.”
아악. 무슨 일이야!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가는 나. 머뭇거리고 있는 지유의 뒷모습이 보인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그릇.”
“뭐?”
“그릇이 다쳤어.”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깨진 하얀 유리 그릇.
대체 어떻게 떨어뜨리면 저런 모양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와그작, 밟아버린 과자처럼 뭉개진 모양이다.
“떨어뜨렸어?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빡빡 씻으라며.”
“빡빡 씻으라고 했지, 있는 힘 다해 씻으라고 하진 않았어.”
“…”
“이씨, 뭐해? 그릇 장사 치러 줄 거야? 이거 버리고 와,”
“응.”
너한테 시킨 내가 죽을 놈이야.
깨진 그릇 파편들을 조심스레 치우고 있는데, 행여나 다를까 이 문제아 아가씨는
또 파편에 손가락이 베고 만다.
“아프다.”
“내가 미쳐!”
“미치지 마.”
“안 미치게 생겼냐?!”
유리 조각 하나가, 지유의 손바닥에 박혀서 달랑 거린다. 푸르스름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흐른다.
엥? 푸르스름한 피?
내가 놀란 눈으로 지유의 손목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녀석은 황급히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
“왜 그래, 치료는 해야 할거 아냐.”
“안 해도 돼.”
그러면서 인상은 잔뜩 찌푸리고 있는 주제에.
뭘 안 해도 돼?
난 순기고 있는 지유의 손목을 잡아 채서, 유리조각을 빼냈다. 흘러내리는 피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뚝 뚝,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보랏빛 핏방울은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피 색깔 예쁘지.”
지유가 물었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변태냐, 이런 게 예쁘게? 기다려봐, 약 가지고 올 테니까.”
“…안 궁금해?”
“궁금해 하지 말라며.”
수납장에서 소독약을 꺼내며, 난 지유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의자에 앉아서 흘러내리는 피를 조심스레 닦아내는 나.
잠자코 손을 내게 맡긴 채 보고 있는 지유다.
“묻지 않을게.”
“…”
“그냥 이것만 알아줄래?”
“…”
“이젠…울어도 돼.”
“울보 아니다, 나.”
“이제 울 곳이 생겼으니까. 울어도 돼. 지유야.”
아래를 보고 있던 눈을 들어 가만히 나를 주시하는 지유.
이제 보니까 눈동자가 참 맑다.
“항상 생각하던 건데, 넌 참 예뻐.”
“알아.”
취소! 은근히 공주병 기질이 있구나, 너?!
인상을 찌푸리며 의약 상자를 다시 수납장에 넣기 위해 일어서는데,
내 허리를 뒤에서 부둥켜 안는 지유다.
“유야?”
“…가기 싫어.”
“뭐?”
“거기…가기 싫어.”
처음이다. 지유가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한 건.
그나저나 나란 인간은 한심하게 심장 박동 수나 빨라지고 있다니.
난 의약상자를 집어 넣고서 가만히 허리에 있는 지유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
한참 만에 내가 꺼낸 한마디였다. 잡고 있는 지유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그런 지유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난 떨고 있던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갈 데 없으면, 여기 있어.”
“오빠는.”
“내가 찾아줄게!”
“무슨 수로?”
어떻게 든 되겠지. 나의 정보력이 안되면, 아버지의 힘을 빌릴…안돼.
그 영감이 알면 무슨 소릴 할 지 몰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줄게!”
“…현중아.”
“그냥 여기 있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말란 말이야.”
“응.”
응? 응이라고 했지, 지금?!
난 꾹 참고 있던 미소를 지으며, 뒤 돌아서서 녀석을 꼬옥 품에 껴안았다.
쿵쾅거리는 지유의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근데 지유야.
“너…”
“…?”
“가슴이라고는 전혀 없구나? A컵이지?”
“…”
그때 화르륵, 하고 나의 앞 머리 끝에 작은 불길 하나가 치솟는다.
“아악! 미안!”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가위를 들고서 지유가 태워버린
앞머리를 열심히 손질 중인 나다.
“그래도 그렇지, 마음대로 실력행사 하지 말란 말이야!”
“치한.”
“야아!”
“그냥 나갈래.”
“안 그럴게!”
“응.”
뭔가 휘둘리는 느낌이다. 아무렴 어떠냐, 저 녀석 데리고 살려면 이 정도는 기본일 테지.
그나저나 창백한 녀석의 얼굴은 아무래도 내 서툰 치료로는 안될 것 같다.
“병원 안 가도 되겠어?”
“…어.”
“그럼 침대에서 좀 쉬어.”
“아니, 괜찮아.”
고집 하나는 정말 세다니까.
어쩔 수 없이 난, 앞으로 지유가 쓸 내 전용 작업실을 함께 청소하기로 마음 먹었다.
먼지 투성이의 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방을 보고서 한숨을 푸욱 내쉬는 지유다.
“작업실 맞나?”
“그…그럼!”
“여기서 작업 하다가 일 망치겠다.”
“미안, 안 사용한지 일년 됐어.”
창고는 무슨, 사실 그냥 잡동사니를 넣어둔 창고에 불과 했다. 그래도 보일러는 들어가니까,
방은 방이지 뭐.
한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로, 먼지털개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지유와
앞치마를 메고서 청소기를 돌리는 나.
어쩐지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부부 같지 않냐?”
“너 아내, 나 남편.”
“무슨 뜻이야!”
“예뻐서.”
“뭐 내가?”
“응.”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유다. 그 바람에 나도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지유야, 네가 더 예뻐.
그거 알아?
내가 처음 너 만났을 때, 난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너무 예뻐서.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예뻐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
위잉_ 청소기 소리, 열어둔 창문으로 느껴지는 초여름의 아카시아 향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네가 언제 그랬잖아, 네 심장은 나한테만 뛴다고.”
“생각 안나.”
“야, 너 진짜 비오는 날 나한테 그랬었어!”
“안 난다.”
일부러 딱 잡아 떼는 걸로 밖에 안 보이는 데요, 지유 씨.
어쨌든, 난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흩날리는 지유의 긴 머리 끝에 살며시 손을 데어 보는 나. 내 손길에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먼지 털기에 집중하는 지유다.
의자에 앉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들려?”
“…”
“음악소리 말이야, 무슨 음악일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분위기 깨지마.”
“바보 선생.”
아마도 그건 사랑의 왈츠 곡이 아닐까 생각 된다.
아, 그나저나 난 제발 나의 이 여자 같은 감성이 사라지길 바란다.
오죽하면 쟤가 나더러 아내래!
이마를 책장에 대고 또 고뇌에 잠겨 있는 내게 지유가 말했다.
“들린다.”
“응?”
“들린다고.”
“엥? 뭐가?”
“음악소리.”
눈을 감고 있어도 지금 지유의 표정이 어떤지 상상이 된다.
보나마나 또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먼산을 쳐다보고 있겠지. 넌 그런 아이니까.
감정 표현이 조금 서툰 무뚝뚝한 그런 어린애니까.
“지유야, 먼지 탁탁, 열심히 털어라!”
“시끄러워.”
“떽, 집주인한테 거역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몰라.”
아마 우리의 동거 생활은 꽤나 시끄러울 것 같다.
* * *
“지유가 사라졌다.”
“네?”
“네가 숨겼느냐?”
“전 미국와서 지유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구요!”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지안은 화를 내고 있었다. 다름아닌 자신의 아버지인 쟌 회장에게.
청와대 사건이 뉴스로 보도되자마자,
전용 비행기로 빠르게 미국으로 온 쟌 회장.
그는 지안을 다그치고 있었다.
“전 몰라요.”
“…”
“정말입니다.”
“그래.”
매섭게 지안을 노려보던 눈동자를 거두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벌써 두 달이나 한가지 일로 지체를 해버렸다.
한국 대통령 암살.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 작은 나라의 대통령 암살쯤은 식은 죽 먹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한국은 지유의 고향이라는 것을.
지유가 그렇게 찾는 그녀의 오빠가 있는 곳이라는 걸.
“아무래도 지유를 데려와야 할 것 같군.”
“…이제 놔줘요.”
“무슨 소리냐?”
“지유 그만 놔 주시라구요.”
“…가능한 소리라고 생각하나?”
“…걘 더 이상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요! 몸이 망가진다구요!”
싸늘한 음성으로 그는 아들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인간 병기 G-you.
열 세번의 실험 끝에 성공한 인간 병기였다.
쉽게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녀는 병기화 될 예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놔줄 순 없었다.
“지안.”
“네.”
“내가 인간 병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네?”
“괜히 허약하게 만든 게 아니야, 그 아인 망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병기화 되고 있는 거다.”
“아버지!”
병기화.
그건 인간이 아닌 상태, 곧 기계화 된다는 말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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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저에게 힘이 된답니다..
춥군요..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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