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애

글/그림 :

에델바이스 [22]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22




"야아! 아직 움직이지 말라니까! 말 진짜 안 듣는다."
"..."

"이봐, 또 상처 벌어졌잖아."
"시끄러."

"어쭈. 이제 학교 밖이라고 대놓고 개긴다 이거지."
"..."




지유의 이마에 붕대를 감아주는 나다.
녀석은 어젯밤 지안의 말대로 부상을 입은 채, 청와대에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소름이 쫘악_ 끼쳤다.


정말이지, 내가 처음으로 반한 여자는 날 피 말려 죽일 작정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애가 왜 이렇게 시들시들하냐, 병원이라도 갈래?"
"아니."

"일단 응급처치는 해뒀지만 그러다가 얼굴에 흉이라도 남으면..."
"..."




그 예쁜 얼굴에 흉 나면, 누가 좋다고 그러겠냐.

멍하니 쇼파 위에 앉아있던 지유는 내가 약품을 정리하는 동안 구석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왜? TV보려고?"
"...뉴스."

"아, 어."




삑_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의 손에 의해 TV화면은 밝아진다.
예쁜 아나운서의 얼굴이 화면 위로 비춰지고,

밑에는 빨간 글씨로 ‘속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내 착각일까? 지유의 동공이 멍하게 멈춰선 것 같다.




“오늘 속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청와대 킬러 습격 사건입니다. 다행히 대통령은
근처 호텔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범인은 킬러가 확실한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특공대의 말로는 18세로 추정되는 소녀라고 하는데요.
그럼, 특공대 대장을 만나보겠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청와대의 정문과 함께 아직까지 대기하고 서 있는 특공대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가만히 TV를 응시하고 있는 지유.




“중대장님, 범인을 목격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범인은 소녀인가요?”
“네. 틀림없는 소녀였습니다. 아마 많아도 19살은 될 겁니다.”




어쩐지 저 중대장이란 놈은 험악하게 생겼군.
그나저나 지유는 아직까지도 TV만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씨, 난 뉴스 같은 거 안 보는데. 재미없잖아.
은근히 난 어린애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유야, 우리 다른 데 보자. 어?”
“…가만.”

“그래.”




후,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니.
스스로가 한심해 지고 있다.

그런데 대체 저 나이에 맞지 않게 뉴스를 진지하게 보는 이유는 뭐야?


한참 중대장인지 뭔가 하는 특공대와 대화를 나누는 기자를 보고 있노라니 지루해진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지유를 쳐다보고 있는 나와 TV만 뚫어져라 보는 지유.




“…구멍 뚫리겠다.”




한참 만에 지유가 말한다.
순간 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민망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 귀에 다시 뉴스의 인터뷰 내용이 흘러 들려온다.




“그런데 범인은 킬러입니까?”
“아니오.”

“네? 신문에서는 킬러라고…?”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잠시 중대장이란 남자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사상자가 아무도 없다는 건, 범인은 살인자는 아니란 거다.




“사상자는 없습니까?”
“정말…기적같이 급소만 치고서 지나갔습니다. 바람처럼요. 강한 소녀였습니다.”




흠, 별난 킬러도 다 있군. 청와대에 들어갈 만한 배짱이라면, 사람을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소녀라…

소녀라.
힐끗, 지유를 쳐다보는 나다.

난 어젯밤부터 계속되는 예감에 지유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제 그 시간에 청와대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지안은 대체 왜 나를 청와대로 보냈을까.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강해져.”




믿고 싶지 않은 예감이 머리 속을 스쳐가고 있을 때.
담담한 표정으로 지유가 말했다.

지유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했다.




“뭐…?”
“청와대 습격한 킬러는 나다.”




내 안에 꼭 숨겨두었던 무언가가 지유의 단 한마디에 쨍_ 하고 깨져버렸다.
그건 아마, 지유는 절대 아닐 거라는 불안한 믿음.

저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섬뜩함에 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무섭나.”

“아니! 장난치지마.”
“믿기 싫으면 믿지마.”




믿지 않기에는, 네 눈이 너무 곧게 나를 보고 있으니까.




“왜, 왜 얘기해주는 건데?”
“내가 박현중 좋아하니까.”

“하아…진짜 미치게 고맙다.”
“무섭나?”




지유는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무섭냐고. 아까부터 떨리는 내 목소리를 눈치챈 모양이다.
무서운 건 아냐. 다만 이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런 거…아냐.”
“…”




지유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 그런 나를 다 이해한다는 듯, 지유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 위에 와 닿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박현중이 나 무서워 해도. 이젠 안 울어.”
“…누가 무섭대?!”

“떨고 있으면서.”
“이건 그냥!”




지유의 두 손이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떨리고 있던 손이 감쪽같이 멈췄다.
지유에게서 특유의 연한 쟈스민 향기가 느껴진다.

이렇게 안겨있으니까 꼭 내가 어린 아이가 된 것 같다.




“현중아.”
“왜.”

“…나, 이제 학교 안가.”
“왜?!”




언성이 높아졌다.
그냥 화가 났다. 항상 내 마음따윈 상관없이 움직이는 지유에게 난 화가 났다.




“왜 네 멋대로 하는 건데? 난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닌 거야? 말 그대로 선생?!”
“…어.”

“하, 좋아해서 미안하구나.”
“…”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애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진 박현중이다.
한동안 침묵이 지속된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랑 있으면 위험해.”
“위험해도 내가 위험해.”




어른인 척 하지마. 내가 너보다 더 살았고, 너보다 너 세상에 대해서 잘 알아.
하지만 지유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면, 어느새 난 작아지고야 만다.




“싫다. 나 때문에 박현중이 위험해지는 건.”
“대체 네 정체가 뭐길래 내가 위험해지는 건데?!”

“초능력자.”
“…진짜?”

“내 심장에…초능력 생성 에너지가 달려있다는 거 알고 있었지.”
“…”




그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린, 지유의 심장.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온다.

넋 나간 얼굴을 보고서 지유는 여전히 내 뺨을 가만히 만져줄 뿐이었다.




“내가 어제 청와대에 있었던 이유, 궁금했잖아.”
“…”




그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얘기 안 해줘도 되는데.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려는 네 눈빛이 너무 서글퍼 보이니까.




“지유야.”
“…”

“너, 어제 덜 울었나 보다.”
“다 울었다.”

“아니, 지금도 눈물이 맺혀 있어.”
“…”




뺨을 어루만지는 지유의 손을 잡아 내리고서 다른 한 손으로,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쓸어 내려주는 나다.

울면서 무슨 얘길 하려고.




“한번 울기 시작하니까”
“…”

“계속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슬플 때 위로해주기 위해서 흐르는 거니까, 참지마.”




대체 얼마나 참아온 걸까.
18살이면, 그 나이답게 울고 투정 부리고, 짜증내고 악 써도 될 나이인데.

아직은 한참 어린데. 굳이 눈물을 참지 않아도 될 텐데.




“내가 한국에 온 이유.”
“그래, 그래.”

“한국 대통령을 죽이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어.”
“…응?”

“한국 대통령.”
“뭐어?!”




놀란 내 얼굴을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을 잇는다.
잠깐, 그나저나 지금 내가 무슨 얘길 들은 거야?

누가 누굴 죽여?




“말했잖아, 내가 킬러라고.”
“…하아, 나 지금 정리가 안 된다.”



그러고보니 항상 궁금했었다.
지유의 방을 감시 하는 그 카메라는 무엇이며, 그 오피스텔에서 그녀를 가둬두는 이유.




“그냥 믿으면 된다.”
“안 믿을래, 밥 먹자. 나, 밥 되게 잘 한다?”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재빨리 앞치마를 둘러메고, 부엌으로 향하는 나.
그때 등 뒤에서 뜨거운 느낌과 함께 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 서.”
“…?”

“이래도 못 믿겠나?”




난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뒤 돌아 선 내 눈에 보이는 건, 오른쪽 손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물론 나의 반응은.




“아악!! 불!! 물!”
“…”

“이리와, 욕실로 가자!”
“…이건 내가 만든 불이야.”

“어?”




지유가 펴고 있던 손바닥을 쥐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불길.
난 꼭 환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믿을래?”
“…”

“네가 날 믿어줘야, 지켜줄 수 있다.”
“지키는 건…나라고 했잖아.”


“내가 킬러라는 거, 인간 병기라는 거 아무한테도 말 한적 없는데.”
“…”

“믿어 줄 건가.”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주겠냐.”




그 불쇼까지 보여 주고서 나에게 믿지 말라는 건 무리란다.

그제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와 식탁에 앉는 지유다. 덕분에 난 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애써야 했다.




“현중아, 이거 뭐야.”
“아아…김치찌개.”

“맛없다.”
“야!”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음식을!!
하지만 끝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 주는 지유다.

가만히 식탁에 턱을 괴고, 지유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 나.




“유야.”
“왜.”

“…너 나랑 같이 살래?”
“교사가 학생 꼬신다.”


“이씨.”
“…안돼.”

“그럴 줄 알았어. 왜 안 되는데? 넌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잖…”




아차, 말 실수를 한 것 같다. 황급히 입을 막는 나를 보더니 지유는 쓸쓸하게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다.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다 놓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서는 녀석.


달그락거리는 그릇소리.
그리고 아주…아니, 조금은 슬퍼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




“돌아갈 곳은 없지만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있다.”
“어?”

“…내가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
“그런 살인자 집단에 네가 왜 가야 한다는 거야?”




내 딴에는 녀석을 걱정하는 데서 나온 질문이었지만, 지유는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찾아야 할…사람이 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게…누군데?”
“…오빠.”

“오빠?”
“우리 오빠.”




단 한 사람한테만 오빠라고 부른다고 말했던 지유. 그런 지유가 찾는 사람이 다름 아닌 오빠라니.

난 멍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로 다가와 가만히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춰준다.




“뭐…했니?”
“키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지안.”




난 몰라. 겨우 식혀둔 얼굴이 다시 홍당무처럼 달아 오른 것 같다.

그런데 가만, 누구한테 배워?!




“지안? 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노랑 머리?!”
“금발인데.”

“금발이나, 노랑이나!!”
“다른데.”


“너 지금 그 자식 편 드는 거냐?!”
“아니.”

“아무튼 걘 지가 뭔데 너한테 그런 걸 가르쳐 주는데?!”
“…질투하나.”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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