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20]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20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는 지유.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유야?”
“왜…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잇지 않고 있는 지유. 고함소리 덕에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동안 지유를 지켜보았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아이인지라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본다.
난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가자.”
“…”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자, 빠른 걸음으로 날 앞질러 밖으로 나가는 지유다. 아직까지 수근대는 교실 안. 일단 상황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쉬는 시간엔 원래 노는 거야, 놀아라!”
“선생님, 쟤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아, 쟤가 요새 사춘긴가 봐.”
“네?”
“하하, 사춘기 청소년의 심리는 다 그런 거지. 난 이만 나가본다.”
어색한 변명을 늘어 놓고, 재빨리 복도로 뛰어 나가는 나다.
예전에 지유와 다툰 보희의 곱지 않은 시선이 거슬렸지만 지금의 난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복도로 뛰어나가자, 저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는 지유가 보인다.
녀석의 빠른 걸음 탓에, 점점 멀어져 가는 거리를 좁히느라 빨라지는 발걸음이다.
아침 자습 시간이라 조용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냐?! 거기 서봐.”
적당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학교 뒤 건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지유다.
어느 정도 교실에서 벗어났다 생각하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하는 나.
“하아, 하아…”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뛰었을까. 무릎을 짚고서 잠시 쉬고 있는 내 눈이 주위를 빙 돌다,
한 곳에 멈추어 선다.
하필 또 왜 뒷산에 올라가 있는 거냐. 모처럼 세탁한 흰 바지 더러워지겠다.
언덕 위에서 멀뚱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는 지유다.
대체 저기까진 어떻게 올라간 거야?
아고, 넌 창창한 10대일진 몰라도 난 20대 중반이란 사실을 알아주련.
쑤셔오는 허리를 견뎌내고 언덕 위에 다다른 나.
멍하니 앉아있던 지유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했다.”
“됐어, 됐어. 그것보단 이유를 듣고 싶으니까.”
“…”
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항상 그렇다.
지유는 필요한 말만 입 밖으로 낸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이 아이의 마음 속은 어떤 말들이 숨어 있을까? 혹시…참고 있는 건 아닐까.
“참지마.”
“…”
“할말 있으면 말하고, 화났을 땐 욕을 해! 그게 안 되면 소리라도 질러, 아까처럼!”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마.”
예상대로 살벌한 말투지만, 어쨌든 난 지유를 화나게 하는 데 성공 한 것 같다.
“그래, 난 아는 게 없어. 그러니까 네가 말을 해야 알아.”
“알려고 하지마.”
“내가 말했지, 좋아한다고.”
지유는 끝까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침묵을 유지 할 뿐이었다.
“좋아하니까 알고 싶은 거야. 알아?”
“…”
“무슨 말이든지 좋으니까 해!!”
말을 안 하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마음 속에 담아두지만 말고, 말을 해.
난 그녀가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랬다.
누구보다 슬픈 눈동자를 지닌 지유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현중아.”
“그래.”
“남희라는 이름 어디서 들었나?”
아까 교실에서도 묻더니, 남희란 이름은 지유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또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한 지유로 인해. 난 온몸이 섬뜩해졌다.
“그냥 꿈에서 들은 이름인데, 왜? 아는 사람이야?”
“…꿈.”
“그래.”
“…그거.”
“어.”
“내 이름이야.”
내 이름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럼, 다른 이름이 또 있다는 거야?
의문 가득한 눈으로 지유를 쳐다보는 나다. 내 시선을
“내 원래 이름이 남희였다. 유남희.”
“…그럼 내 꿈에 나타난 꼬마가 너야?”
“…몰라.”
“이야, 대단하네? 이제 내 꿈에도 나타나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서 입을 막고 웃고 있는 나. 그런 나와 달리 불안에 가득찬 지유의 눈동자다. 그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난 지유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수업 들으러 안 갈래?”
“…어.”
“왜 이렇게 심각해?”
“박현중은 수업 하러 안 가나?”
“다음 수업 없어.”
“…”
맞은 편 학교 옥상을 쳐다보며 피식, 웃어 보이는 지유. 다음 수업이 없다는 내 거짓말을 눈치 챈 걸까?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는 그녀다.
“내가 꿈에서 너한테 뭐라고 했나.”
“…어?”
난데 없이 또 꿈 얘기다. 가만, 꿈에서 그 꼬마가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오빠라고 했었지.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오빠라고만 그랬어.”
“…오빠?”
“어.”
“…”
또 입을 닫아 버렸다. 난 궁금해 미치겠는데. 익숙치 않은 침묵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내게 지유의 손이 보인다. 그대로 난 슬그머니 지유의 손을 잡았다.
“응큼하다, 박현중.”
“아하하.”
“현중아.”
“왜?”
“무섭다.”
“뭐가?”
“내가 엄청 재수없거든.”
“알긴 아는 구나.”
말하는데 싸가지가 뚝뚝 넘쳐 흐르는데, 그럼 재수가 좋은 줄 알았냐?
그런 너한테 반한 나도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빤히 날 노려보는 지유. 멋쩍게 웃으며 지유의 이야기를 듣는 나다.
“내가 엄청 재수없어서…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재수없어져.”
“응.”
“그래서 무섭다.”
“뭐라는 지 하나도 모르겠다, 지유야.”
“박현중 재수없어질 까봐 무섭다, 난.”
“하하, 이 녀석 나 또 감동 먹이네.”
난 무섭다는 지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단 둘뿐이었던 시간이 즐거웠을 뿐,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아, 지안은 갔어?”
“…끈질겨.”
“응?”
“안 가고 아직도 버틴다. 끈질기게.”
하하. 그럼 그렇지, 그 놈이 나한테 약혼자라고 으름장까지 놓은 놈이야. 쉽게 떠날 리가 없지.
끈질기다고 말하는 지유가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입을 꾹 막고 웃음을 참는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빤히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는 지유.
“웃어라, 그냥.”
“아하하.”
“아마…내일은 떠날 것 같다.”
“지안?”
“내일도 안 떠나면, 위험하거든.”
“…”
지유의 끝 말을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내일은 정말 지안이 떠나는 모양이다. 휴, 배웅하러 가야 하나? 명색이 담임인데.
시간을 알아야 가던지 하지. 힐끔 지유를 쳐다본다. 그런 내 눈을 읽은 걸까. 지유는 말했다.
“내일 새벽, 두시 비행기.”
“엥?”
“…나, 교실 간다.”
“그래, 담당 선생이 뭐라거든, 상담했다고 그래. 내 이름 대고.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서는 지유.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언덕 밑으로 사라져간다.
그나저나 지금 내가 그 녀석 배웅하려고, 새벽에 일어나야 한단 말야?! 저혈압으로 항상 수면부족인 내가?!
가르쳐 준 지유의 성의도 있으니, 가야겠군.
* * *
“가지마.”
“…”
“가지마…”
“잘 가.”
제너멀 오피스텔의 입구에서 검은 장갑을 손에 끼고 있는 지유와 그녀를 말리고 있는 정장 차림의 지안.
오늘은 그녀가 임무를 수행해야 날이다.
그리고 지유의 이번 임무는 ‘청와대 습격’ 이었다. 미국의 백악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거기다 이미 지유가 한번 실패를 경험한 곳이기도 했다.
“불안하다고! 이제 난 도와줄 수도 없어.”
“…”
한 시간 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지유를 붙잡고서 극구 말리는 지안. 그런 지안을 힐끗 쳐다보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나 조심해라.”
“뭘!”
“비행기 추락하지 않게.”
“추락 안 해!”
버럭, 화를 내는 지안이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한번도 자신에게 웃어주지 않던 지유가 웃고 있으니까. 마지막이긴 했지만, 그녀는 미소 짓고 있으니까.
박현중은 차가운 얼음과도 같던 지유를 미소 짓게 만든 사람이었다.
“지유야.”
“왜.”
“일부러 지금 나가는 거지, 나 배웅 안 해주려고?”
“아니라곤 말 안 해.”
“그럼 내 마지막 작별인사는 듣고 가.”
“…”
자동문으로 걸어가던 지유는 멈춰 선다. 그리고 지안을 향해 뒤 돌아 섰다. 그런 지유를 지안은 꼬옥 안았다.
“지금 내가 떠나는 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야.”
“…”
“꼭 다시 돌아와.”
“네가 와.”
“뭐?”
“네가 다시 한국으로 와.”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지유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평소와 같았다면 절대 그녀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지유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야.”
“…”
“죽는 건, 절대 용서 안 해.”
“누가 죽는다는 건가.”
“그래, 절대 죽어선 안돼. 다시 살아서 만날 거니까, 이건 마지막이 아니야.”
“…”
초능력으로 인해 망가진 지유를 알고 있는 지안. 계속은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그녀가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길 바랬다.
그리고 청와대로 향하는 지유는 그의 눈에 꼭 죽으러 가는 사람과도 같았다.
“나대신…”
“응?”
안고 있는 그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유.
“박현중이 나대신 배웅 나갈 거다.”
“왜 그 사람이야?”
“내 심장은 박현중이니까, 내 대신이다.”
“유야.”
지안은 지유를 안고 있던 팔을 놓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그는 작별인사를 한다.
“네 사랑까지, 내가 지켜 줄테니까.”
“…”
“행복해야 돼.”
“…”
“내가 보기엔, 하나도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
그렇게 지유는 지안을 뒤로 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 * *
인천 국제 공항. 01 : 50 : 35.
새벽인데도, 여긴 사람이 넘치는 구나. 제길, 이 새벽에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벌을 위해 배웅을 하러 와야 한다니.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온다. 지유는 배웅하라는 말 따윈, 절대 한 적이 없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지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후우, 지유만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거 마중하러 올 일도 없었어.”
대기 의자에 앉아서 지안을 기다리고 있는 나. 그런 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너 같은 거? 설마 전 아니죠, 선생님?”
낯익은 목소리고 고개를 뒤로 돌리는 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 곳엔 싱긋 웃고 있는 까만 정장을 입고 서있는 금발의 지안이 있다.
아니긴 왜 아니겠냐. 너 맞아.
난 입술을 씰룩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유가 배웅나올 거라고 했는데, 진짜로 나오셨네요?”
“지유가 그래?”
“네.”
”아악, 걘 역시 나한테 가라고 한 거였어.”
“선생님.”
“왜?”
“…지유 아니, 남희요.”
난 남희라는 이름에 귀가 번쩍 띄었다.
이 녀석도 알고 있구나, 지유의 원래 이름을. 하긴 가족이니까 알고 있겠지?
“아프다는 거 알아요?”
“알아.”
“그런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본인이 원하지 않으니까.”
“걘 원래 그래요, 좋다, 싫다. 말할 줄 몰라요.”
“알아, 그 정도는.”
“그 이유도 알아요?”
…아니, 몰라.
굳은 표정으로 지안을 쳐다보는 나다.
지유가 말하지 않는 이유를, 녀석은 알고 있는 걸까.
멍한 표정의 나를 보며, 지안은 말했다.
“…그렇게 배워 왔으니까.”
“뭐?”
“지금 당장 청와대로 가보세요.”
“응? 야, 나 서울에서 너 배웅하려고 나왔는데, 다시 가라고?”
“가보면 알아요.”
“넌?!”
“가요, 배웅은 필요 없어요. 이제 곧 비행기 올 건데요, 뭐.”
“근데 난데없이 청와대는 왜 가라는 거냐?”
“거기 지유 있을 거예요.”
“뭐?”
더 이상 말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가라며 손을 흔드는 지안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지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마도 녀석은 내 기억에
건방진 금발머리의 소년으로 기억될 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 새벽에 청와대로 가야하나 싶지만, 지유와 관련된 것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난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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