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애

글/그림 :

에델바이스 [19]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9



"그래, 학교는 언제 그만둘 거냐."
"그만 두다뇨? 전 그만 둔다고 한 기억이 없는 걸로 압니다."


"이 집에 발을 들인건, 그만 둔다는 뜻 아니었나?"
"저는 반찬 가지러 온 거라구요!"


“삐뚤어진 건 여전하군. 잔말말고 회사나 들어가.”




휙휙. 위협조로 방망이를 휘두르고 계시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엄마는 이미 이 아들을 버리시고 주무시는 중.

시계는 재깍재깍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저 이만 가면 안돼요? 오늘 1교시부터 수업 있어요.”
“내 알 바 아니지.”

“저 짤리는 거 보고 싶으세요?”


“어, 당연하지.”




젠장, 우리 아버지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난 지유 때문에라도 학교로 가야 한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꿇어앉아있는 나와 지그시 나를 노려보시는 아버지. 저 눈빛을 봐서는 절대 안 보내주실 것만 같다. 하아, 또 저 번처럼 도망쳐야 하는 건가.




“아버지.”
“왜?”

“저기 하늘에!”
“비행기가 추락한다고? 이젠 안 속아.”


“아뇨, 별이 떠있다구요.”




쳇, 같은 수법은 안 통하는 구나. 난 또 가만히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꿇어 앉아있는 탓에 다리가 서서히 저려온다.

아…스물 여섯이나 된 내가 대체 이 무슨 추태인가.




“아버지이…”
“흠, 정선생에게 듣자 하니, 요즘 연애한다며?”




정춘자, 웬일로 조용한가 했더니! 이 왕치사 스파이 같은 노처녀야!!


이를 잘근잘근 갈았다. 학교로 돌아가서 정춘자의 책상에 꽂혀있는 미소년 앨범을 반드시 불태워 주겠노라 맹세하며.




“연애는 무슨, 그럴 여자도 없어요.”

“정선생의 말로는 같은 반 학생이라며? 학교에 알려지면 너 큰일나지?”




협박을 하고 있구나, 이 영감이.

저만 큰일나는 게 아니라, 지유도 위험할 텐데요.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그건 못 봐요.




“저…이만 갑니다.”
“반항이냐?”

“호적에서 파버리셔도 좋아요, 저 지금 기다리는 사람 있거든요.”
“여유만만이로군, 박현중.”


“사랑에 빠지면 용감해진다고, 누가 그러더라구요.”




휙, 자켓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하는 날 그저 보고만 계시는 아버지.

아,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뒤쫓아 오시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기적이다. 정말 호적에서 파버리시는 건 아니겠지?




“휴, 십년감수했네.”




이제 서울로 미친 듯이 차를 밟는 일만 남았다.




* * *



과천, 박현중의 집.



“그 아이는 안 되는데.”
“네? 누구요?”


“아니야.”




박현중의 아버지이자, G화학의 회장인 박민서.
그는 정춘자에게 지유의 얘길 전해들은 순간부터, 지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G그룹의 숨겨진 간부, 거기다 한국 재계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 G-you란 이름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왜 그 많은 사람들 중 하필 지유란 말인가.’




그는 예전에 지유의 초능력 실험 현장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다. 텔레포트, 화력, 순간 이동, 공중부양, 심지어 도시 하나쯤은 허울 좋게 무너뜨릴 수 있는 인간 병기의 파괴력을.


그리고 낯익은 얼굴.




“상부에…보고를 해야 하나.”




자신이 애지중지 길러온 외동아들을 그런 인간 병기에게 넘겨줄 만큼 인자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현중은 G화학 회장인 자신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어나가야 할 후계자였다.


총수인 쟌 회장에게 보고를 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현중을 다치게 할 것이 뻔했다. 박회장에게 있어서 박현중이 보물이라면,

쟌 회장에게서는 지유가 둘도 없는 무기였으니까.




“이대로 두면, 현중이가 위험해져.”




조금씩 현중과 지유를 둘러싼 톱니바퀴는 움직이고 있었다.




* * *




“아아아악!!!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귀따갑다.

귀가 멍해질 정도의 비명을 질러대는 정춘자. 그 비명을 못 들은 척 넘겨버리고 열심히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나다.




“보면 몰라요? 밤 굽잖아요.”
“아악! 그런데 왜 하필 내 사진 집들을 태워?!”

“오호라, 그럼 선배 책상에 잡지책들은 태워도 돼요?”

“그러니까 왜 내 껄 태우냐고!”




잘못한 인간이 누군데, 지금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마지막 남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진을 태우고서 천천히 일어나, 소각장을 빠져 나왔다. 아직까지 잿더미 속을 뒤적이는 불쌍한 정씨.



손을 탈탈 털며,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후우, 이만하면 새벽의 복수는 충분한 건가?


어디 소문 낼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다가 그걸 말하냐, 정춘자 이 망할 노처녀야!




“후우…”

“아침부터 한숨 쉬지마.”




깜짝이야.

과천에서 바로 학교로 직행했던 탓에 몽롱한 상태의 날 부르는 목소리. 내 예민한 청각에 의하면 이건 지유의 목소리다.


구겨졌던 인상을 활짝 펴고서, 최고의 미소로 뒤 돌아섰다.




“좋은 아침이지?”
“…아침부터 왜 생글거리나.”


“사람이 웃으면 같이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돌아오는 건 지유의 무표정한 얼굴. 이씨.
그러고 보니, 항상 옆에 붙어 다니던 지안이 보이지 않는다.




“지안은?”
“수속 밟고 있다.”




아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다고 했었지? 전학 온지, 이제 두 달도 안 됐는데 가버리다니.
은근히 아쉬운 감이 든다.

지안은 돌아가는데 지유는 왜 안가는 걸까?




“궁금한 표정이네.”
“하하.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난 할 일이 있어서 남은 거야.”
“할 일?”




나 때문에 남은 게 아니라?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시무룩해진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는 지유. 순간 얼굴이 확 달아 오른 나다.




“왜 웃어!”
“…현중아.”

“왜? 왜 웃냐니까? 학교에서 이름 부르지 마!”
“내가…”


“어?”




열어둔 복도 창문으로 살랑이던 5월의 봄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을 타고서 흩날리는 지유의 검은 머리 카락. 그리고 특유의 낮은 저음의 목소리.




“넌 내가 지킨다.”




…뭐래는 거야. 누가 누굴 지켜.




“대사가 바뀐 것 같다.”
“…”

“내가 널 지키는 거겠지.”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에 와 닿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손을 쳐냈을 텐데 오늘은 가만히 날 올려다 보기만 하는 그녀다.




“왜? 할말 있어?”
“…내일 나 학교 안 와.”

“아예, 자퇴서를 내지 그러냐.”
“자퇴서 내면, 박현중 못 보잖아.”

“그건 그래. 아하하.”




하루 꼬박 밤을 샜던 피로가 지유의 한마디에 사라졌다. 멋쩍게 웃으며 걷는 나를 보며 말없이 미소 짓는 지유. 예전엔 그렇게 웃는 모습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는데.

요즘엔 웃는 날이 많아졌다.


뭐, 나에 대한 사랑의 힘이겠지만.




“내일은 왜 못 오는데?”
“일이 생겼거든.”

“학생이 뭐가 그리 바쁘냐, 넌.”
“…오늘 밤에 지안이 미국으로 돌아간다.”


“뭐?”
“오늘 밤 9시 비행기야.”

“아…”




내게 굳이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는데. 가르쳐 준 이유는 아마도 배웅을 가란 얘긴가?

함께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휙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지유.
아무래도 학교라는 데,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얄미운 녀석이지만, 배웅이나 나가볼까?”




담임에게 인사도 안하고 훌쩍 떠나려 하다니, 괘씸한 녀석. 하긴, 녀석은 지유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날 미워하는 건 당연한 건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도착한 교실.
2학년 4반이라는 팻말이 날 우울하게 만든다. 오늘 아침도 복도까지 가득 메우는 괴성에 어김없이 인상을 구기는 나.


내가 학생 때는 저렇지는 않았단 말이다!
휙, 앞문을 열며 오늘도 변함없는 인사를 하는 나다.




“오늘도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아, 안녕.”

“안녕하세요!”




교탁에 서자마자 보이는 건, 맨 뒤에서 엎드려 있는 지유.
지유야. 좀 일어나렴.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한번도 내가 들어오는 시간에 일어나 있는 걸 본 적이 없어!
물론 영어 성적은 안 봐도 잘 하겠지만.




“내가 오늘 밤을 샜거든?”
“네에.”

“그러니까 자습할래, 쪽지 시험 칠래?”
“자습요!”




그렇게 따로 고함치며 놀던 아이들이 합창 하듯, 대답한다. 그래. 나는야 자습을 사랑하는 선생이란다. 모두들 그런 의미에서 자습♡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지지, 그러므로 자습!”
“자면 안돼요?”

“안돼, 교장 선생님한테 죽어.”
“에이!”


“교권에 도전하지 말아라.”
“네에.”




자습을 시키자 마자, 아이들은 한 둘씩 책상에 엎드리기 시작한다. 휴, 일어나라고 소리지를 기운도 없다. 서있기도 뭐해서 난 지유 옆의 빈자리로 걸어간다.


또박 또박, 발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드는 지유다.




“자던 잠 마저 자.”




소근거리는 내 목소리에 흥미 없다는 듯, 지유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붙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 아인 언제나 창 밖의 하늘을 주시하고 있다.




“하늘에 뭐 있길래, 하늘만 보냐.”
“…구름.”


“그저께 비 맞았는데, 괜찮아?”
“…”




괜찮은가 보구나. 싱긋 웃으며 비어있는 지안의 자리에 앉았다. 난 턱을 괴고, 그녀와 같은 방향을 주시 한다. 아직 흐린 먹구름이 잔뜩 떠다닌다.

그리고 이내 내 시선은 하늘을 지나, 지유의 가느다란 옆 모습으로 이동한다. 언젠가 정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 난다.


‘근데…쟤 은근히, 너랑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냐, 진짜 눈매가 닮았다니까?’


에이씨, 노처녀 아줌마. 안 닮았다니까요?
자꾸만 소풍 날 노처녀 정춘자가 중얼거리듯 말한 소리가 귓가에 앵앵 하고 울린다.


닮긴 개뿔.
내가 아무리 여자 같다지만, 지유랑 닮은 수준은 아니라고.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 아니!”

“피곤해 보인다.”
“넌 아까 내 말을 뭘 로 들은 거냐, 밤 샜다니까.”


“…자라.”
“이봐, 난 선생이라고.”

“선생은 자지 말라는 법 없다.”
“그건 그래.”




넙죽, 그대로 엎드려서 눈을 살포시 감는 나. 감은 눈꺼풀 사이로 지유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많이 피곤했던 탓일까, 난 1분도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그리고 난 또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


며칠 전 꿈에 서봤던 꼬마 아이. 진흙 투성이의 얼굴로 울며 길을 헤매는 아이.




‘네 이름이 뭐야?’
‘남희.’




“딩동댕동_”




쉬는 시간 종소리와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 지유의 멍한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는 걸 보니, 또 잠결에 남희란 이름을 나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있었나 보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나, 자다가 침 흘렸냐?”

“…남희라는 이름.”


“어? 나, 또 잠꼬대 했구나?”

“…”


“쉬어라, 난 가볼게.”

“어떻게 알아.”


“응?”




유난히 떨리는 지유의 목소리가 날 잡는다.




“그 이름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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