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18]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8
"...뭐라 그랬어."
"다음에 들어, 지금은 말해 줘봐야 안 믿을 테니까."
가늘게 떨리는 지유의 목소리. 초점이 어긋난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더니 지안은 다시금 입을 다문다. 문 손잡이를 잡는 지안의 팔을 붙잡는 지유의 새하얀 손.
눈에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지유의 손이다.
“얘기해주고 가.”
“…”
“오빠가…누군지 알고 있어…?”
“…”
“말해.”
“누구라고 생각해?”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는 지안. 무표정한 지유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린 채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는 비밀을 가지고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미안. 벌써 만났다는 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아버지께선 알고 계실 거야.”
“왜 가르쳐 주시지 않아?”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날 더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이용당해줄 수는 있어. 이미 13년 동안 난 이 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
“우리 오빠한테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난 용서하지 않아.”
사람을 죽일 때의 그 눈빛이다. 킬러의 눈빛.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는 지유의 살기였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지유의 눈에서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
언젠가 비밀리에 지유를 관찰한 미국 한 기업에서는 그녀를 도시 하나 정도는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의 지유는 소중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유야.”
“왜.”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래.”
“…”
행복. 그녀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하지만 지안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는 걸. 그리고 자신도 그녀의 행복을 원했다.
박현중이란, 별 볼일 없는 고등학교 교사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지유지만, 그래도 그는 빌었다.
“나로 인해 행복할 수 없다 해도.”
“…”
“난 네가 행복해지길 바래, 더 이상 불행해지는 건 안돼.”
말을 마친 지안은 뒤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간다. 그의 머리 속에는 계속 한마디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넌 행복해야 돼.’
한순간 긴장했던 탓일까. 지안이 방문을 나서자 마자,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는 지유다. 긴장했던 건 사실이었다.
지안이 말한 ‘오빠’라는 존재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가 아니길 빌었다.
다행히도 지안은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이마에 팔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박현중’
이럴 때 눈물이라도 흐를 수 있다면, 속이 편할 때까지 울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울 수 없다. 마음 편히 울 장소도, 모든 것을 씻어낼 눈물조차 없다.
“무서웠다.”
세상에서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유는 무서웠다고 말한다.
“우리 오빠가…박현중일까봐, 무서웠다…나.”
눈을 감고서 중얼거리듯 말하는 지유. 아직도 그녀의 마음 속에는 비가 내린다. 따스히 몸을 감싸던 오늘 하루의 봄비가 마음 속에 젖어 든다.
그리고 흐르는 비 사이로 보았던 박현중의 얼굴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왜 하필 박현중이냐고 지안이 질문 한 때가 있었다. 물론 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이랬다.
‘내가 아니라, 내 심장이 선택했다.’
지유가 박현중을 좋아하게 된 이유. 그녀의 심장이 선택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때까지 자신을 지켜준 지안 다음으로 믿을 수 있었던 사람.
해맑은 미소가 눈부신 사람. 자신과는 반대로 양지에서 웃는 사람. 그런 박현중에게 지유의 심장은 반응했다.
“지켜야 할게…두개나 된다.”
지유에게서 이젠 지켜야 할 사람은 ‘오빠’ 단 한 사람이 뿐만 아니라 박현중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과천
“엄마, 아버지 안 계시죠?”
“그래, 인석아. 왜 이리 늦었어?”
“그냥 오늘은 기분 좋아서, 이런 저런 생각 하다 보니까 늦게 왔지요.”
“네 아버지가 너 오면 벼르고 계셔. 숨어 있다가 반찬 챙겨서 가져가.”
“옙.”
여전히 인자한 미소로 날 맞이해주시는 엄마. 나와 닮은 눈매가 유난히 서글서글 하신 분.
난 지금 과천의 집에 와있다. 물론, 호랑이처럼 무서운 아버지가 오기 전에 냉큼 반찬 보따리만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서야 한다.
아직도 잊지 않는다.
4년전 이 집을 나서면서 들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한번만 더 이 집에 발걸음 하면, 다리를 아주 두 동강 내주마.’
아무리 아버지가 연로하시다 하지만, 나 하나쯤은 골로 보내고도 남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어서 나가야지.
부엌에서 또 눈물을 훔치시면서 반찬을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엄마. 난 그런 엄마의 뒤로 다가가 살며시 안아 드렸다.
“엄마, 왜 또 울고 그래요.”
“집에 와서 회사도 이어 받고 그러면, 좀 좋니?”
“아,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잘릴 지도 몰라요.”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어?”
“아뇨.”
“?”
사실 학생 하나를 건드렸답니다. 하하.
라는 말은 죽어도 못한다. 왜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약한 우리 엄마는 졸도하시고도 남으실 테니까. 지유가 졸업할 때까진 비밀로 해야 하는 건가.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무단결석에 무단 조퇴 무단…학생 같으니.
넌 내가 담임이 아니었으면, 네 출석부는 이미 빨간 펜으로 난도질 당해 있을 거라고.
다행인 줄 알아.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네, 걱정 마시라니까요.”
“흑, 내가 너를 어떻게 믿니, 소풍 가서 혼자 길 잃고…수학여행 때는 기차 잘못 타고…”
“하하하…그땐 그 때구요.”
나의 창피한 과거를 자꾸 끄집어 내지 마시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시계가 아홉시를 가리키자마자, 후다닥 반찬 통을 들고 차를 급히 빼서 대문으로 향했다. 이 놈의 집은 무슨 마당이 이렇게 넓어?
이러다가 아버지한테 발각되기라도 하면…난 죽은 목…숨.
“빵빵_”
제길. 난 죽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차고 쪽에서 빵빵 하는 클락션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이 집에 들어올 차라고는 나의 자랑스러운 소나타와 아버지께서 타고 다니시는 에쿠스.
슬금슬금, 후진을 시도해 보건만, 이미 까만 에쿠스는 나의 소나타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아아, 제발 저를 그냥 들렀다 가는 방문판매인으로 대해주시고 넘어가주세요, 아버지!
그러나 이미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께선 차에서 내리시더니 내 창문을 톡톡, 치신다.
핸들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있다가, 위잉_ 하고 창문을 여는 나.
“하하, 아버지 오랜만이죠?”
“내려라.”
까딱까딱, 내리라는 한마디와 함께 손가락을 까딱이시는 아버지. 주춤주춤, 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내 멱살을 꽉 움켜잡으신다.
“아악, 내린다구요! 내려요!”
그 괴력은 여전하시군요, 아버지.
달칵,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옛날부터 내게 손수 가르치신 태권도 솜씨로 나의 턱을 가격하시는 아버지. 울컥한 난 방어자세를 급하게 갖추지만 아버지의 태권도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한테 이러시기에요?!”
“호오, 그럼 넌 오랜만에 만난 아비를 쌩까고 나가려 했다 말이냐?”
하하하. 쌩 깐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던 중이었죠.
마주치면 틀림없이 다리가 두동강이 날 것이 뻔한데 어떻게 가만히 당하고 있겠습니까?
결국 난 아버지의 손에 의해 다시 질질 끌려 집안으로 발을 들여야 했다.
“당신은 왜 애를 그렇게 끌고 와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날 못 본 척 하고 나가버리잖아.”
“당신이 눈에 띄면 죽는다고 했잖아요!”
“몰라!”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뭘 또!”
…후우, 또 시작하셨군. 제발 부부싸움은 빨리 끝내주세요. 나이도 지긋하신 분들께서 왜 이러신답니까.
지유야, 우린 저러지 말자.
이 순간에도 난 멍하니 머리 속에 지유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늦게 시작된 사랑이 더 무섭다니까? 그나저나 이 두 분은 언제 말싸움을 중지하실까.
오늘 안에만 마쳐주세요. 이제 두시간 남았어요.
전 내일 수업이 있단 말입니다.
“애초에 당신이 쟤를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하, 웃기시네? 무녀독자 외동아들이라고 애지중지 교육 시킨 사람이 누군데?”
아아…그냥 갈까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자꾸 내 눈에 거슬리는 저 야구 방망이부터 치워 둬야 겠다. 아버지께서 언제 저걸 들고 날 향해 달려오실 지 모르는 일이니까.
살금살금, 말싸움 하고 계시는 두 분 몰래 현관으로 다가가는 나.
쇠로 만든 은색 야구 방망이가 손에 잡힐 찰나에 내 귀에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
“박현중, 그거 갖고 이리로 와봐라.”
“…하하하.”
“갖고 와.”
“네.”
엄마, 이럴 때는 말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니예요?!
이날 밤, 정말 비오는 날 먼지 나듯 맞는 나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동네 곳곳에 울렸다.
* * *
제너멀 오피스텔 상층부.
쟌 회장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의 그림자에게 향하고 있다. 이내 곧 그는 붉은 입술을 와인 잔에서 떼며, 말한다.
“지안은 예정대로 주말에 미국으로 떠난다.”
“…”
“이제부터 네가 그 임무를 대신한다.”
“네.”
“지유는 네 관리 하에 들어간다.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는 게 네 임무다.”
“네.”
어둠 속의 그림자는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지안의 말처럼 쟌 회장은 지유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빠를 찾아주겠다는 약속만 했을 뿐, 놓아준다는 얘기는 꺼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지유는 열 세번의 실험 끝에 성공한 유일한 인간병기 였다.
“그 아이는…버릴 수가 없어.”
“…”
“병기에게 사랑따윈 허락해주지 않아.”
“제가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믿겠네.”
“맡겨주십시오.”
어둠 속의 그림자는 쟌 회장에게 굳은 약조를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쓸쓸한 미소만 입가에 품고 있었다.
쟌 회장은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이 나가자 마자, 그는 지유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
“병기에게 사랑이란 없다.”
“네.”
“그를 사랑하나?”
어떻게 알았을까.
박현중의 일은 최대한 비밀로 감춰두고 있던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정보첩자로서 유명한 쟌 회장이라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속여 온 지유였기에 그녀는 적잖게 굳어 있었다.
불에 데인 듯 놀란 지유의 표정을 예리한 그가 놓칠 리 없었다. 아무런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쟌 회장은 한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미워합니다.”
“그래?”
인간병기 G-you.
그녀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해서 미워합니다.’
라고.
과분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란 이유로 살아온 그녀에게 박현중은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 체력이 조금만 더 견뎌주길 바라며.
“믿겠다.”
“네.”
쟌 회장의 의심가득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 지기 시작한다. 조심스럽게 총수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G-you 대답하라.”
“Yes.”
방문을 열며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도착한 지시.
천장에 장치 된 감시 카메라에서 새로운 명령이 흘러나온다.
한국에 온 지도 여러 날 되었는데, 그 동안 한번도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귀에 ‘청와대’ 라는 세 글자가 들어 온다.
“청와대를 습격하라.”
…청와대. 그 곳은 한국 대통령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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