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애

글/그림 :

에델바이스 [17]

일심일애(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7



이날 8교시 종이 땡 칠때까지. 고개도 내밀지 않은 지안과 지유.
결국 나의 믿음을 져버렸다 이거지.


추적추적.


비오는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젖어든다.
제길. 난 비오는 날이 죽을 만큼 싫어하는데.

비오는 날엔 나의 일급 장애인 악질 두통이 어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남희."




혼자 교실에 남아, 비어있는 지유의 책상을 바라보는 나다. 비어 있는 책상 중 유난히 지유의 책상만 슬퍼 보인다. 그냥 슬퍼 보인다.




“기다렸잖아, 왜 안 와.”




혼잣말을 나지막이 내뱉는 나.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교실은 비오는 날 만큼이나 우울해 보인다. 그리고 교실 분위기처럼 내 기분도 울적하다.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하고, 거기다 하필 숙직이라니.




“후우, 이제 숙직실로 돌아가 볼까?”




교실 형광등을 끄기 위해 앞문으로 돌아서려던 난,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무언가에 홀린듯 창문을 다가서는 나. 내리는 비 때문에 하얗게 김이 서려있는 창문을 문질렀다.


깨끗해진 부분으로 내다본 창가. 두 눈은 커지고, 앞 뒤 가릴 새도 없이 난 운동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3층에서부터 미친 듯이 달려, 운동장에 도착했다. 우산도 잊어버린 채 뛰어간 그곳에는 비에 흠뻑 젖은 교복을 입은 지유가 있었다.




“너 왜 그러고 있어?”
“…”


“아파서 안 오는 거 아니었어?”
“…기다릴 것 같아서.”


“뭐?”
“박현중이 기다릴 것 같아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 애.
난 딱 한번만 용서 받을 짓을 해야 할 것 같다. 딱 한번만.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지유를 향해 뛰어가, 그대로 품 안에 꼭 안아 버렸다. 난 아마 훨씬 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 이제 선생 못하겠다.”
“…?”




품 안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 보는 지유. 그런 지유를 더 꼭 감싸 안으며 말을 잇는 나다.




“내가 너 좋아하게 됐어.”
“…”




무표정한 얼굴에 흐르는 비가 꼭 눈물같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일까, 조금 씩 떨리는 지유의 몸. 그리고 빗소리에 묻혀 작게 들리는 그녀의 대답.




“현중아, 내가 너 좋아해도 되나?”
“…”




또 한번, 잠자코 있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난 말없이 가냘픈 지유의 몸을 꼬옥, 끌어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내 대답은 충분했다.

처음으로 내가 심장이 뛴 소녀. 내가 처음으로 업고 달려본 소녀. 처음으로…만나지 못할까 봐 가슴 아팠던 사람.




“현중아.”
“이왕이면 오빠라고 불러줘라.”


“안돼.”




울컥해버린 난 안고있던 손을 떼고, 똑바로 지유를 노려보았다. 그런 내 눈을 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지유.




“내 오빠는…딱 한 사람이다.”
“…뭐?”


“내가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한 사람이야.”
“누군데, 그게?”


“우리 오빠.”




오빠. 오늘따라 참 그 오빠란 말 지겹게 듣는구나.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난 또 한번 나의 재킷을 벗어 지유의 머리 위에 덮어 주었다.




“그거 덮어, 비 계속 맞으면 대머리 된다.”
“…박현중 대머리 되겠다.”


“어디서 악담을 하는 거야, 너.”
“박현중도 비 맞지마.”




머리 위의 하얀 재킷을 살며시 들어, 내 머리 위로 가져다 놓는 지유.

결국 난 지유의 하얀 손목을 붙잡고 건물 안으로 뛰기 시작했다. 뛰는 속도는 나보다 이 녀석이 더 빠른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끌려 가는 것 같았으니까.




“전부터 느낀 건데, 너 달리기 진짜 잘한다.”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까.”


“엉?”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나저나 수업 다 끝나고 학교 온 건, 무슨 심보야.”




콩, 하고 지유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인상을 찌푸리다가 진지하게 다시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주시하는 지유다.




“왜? 할말 있어?”
“…나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마.”


“뭐?”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이 덜컥하고 멈춰버린 것 같다.




“사라져? 어딜? 너 다시 미국 가?”
“…아니.”




지유의 느린 대답이 오늘따라 유난히 답답하다. 조급해진 난 음성을 높여 물었고, 그때마다 조용히 고개를 저어대는 그녀.

난 네가 한시간만 늦게 와도 걱정되는데, 사라져? 안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나 심장에 이상한 거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
“…아니, 나 그런 거 몰라.”

“박현중은 알아.”
“몰라.”


“…”
“그래서? 그것 때문에 네가 죽기라도 한다는 거야?!”

“괜찮아.”
“뭐?”


“내 심장은 박현중한테만 뛰니까.”
“…뭐라는 거야.”




금새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는 나다. 얜 정말 닭살스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구나. 존경스럽다.

빨개진 얼굴을 숨기느라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는 날 향해 말하는 지유다.




“박현중 있으니까, 내 심장은 계속 뛸 거니까.”
“그만해. 나 진짜 쪽팔려.”


“현중아.”
“어?”


“나, 일주일은 결석할 지도 모르는데.”
“뭐?! 왜?”


“지안 미국으로 돌아가거든.”
“뭐? 그 녀석이 돌아가?”




지안이 돌아간다는 말에 기쁨 반, 아쉬움 반으로 소리치는 나다. 뭐 그 녀석이 없다면 훼방꾼은 없을 테지만, 지유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꽤 좋은 녀석이었는데.




“걔가 미국으로 가는데, 니가 왜 일주일이나 결석 해?”
“궁금해 하지 마.”


“아까 못 들었어? 내가 너 좋아한다고.”
“들었어.”


“좋아하니까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
“…나중에 내가 다 말해줄 테니까.”




무표정하기만 했던 지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걸 느낀 난, 더 이상 물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숨기고 싶은 게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정말 자존심 상한다. 내가 여덟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이렇게 휘둘려야 한다는 게.
여자는 다 요물이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에게 심하게 동의한다.




“유야, 너 다 젖었는데 어떡할래?”
“…그냥 너 보러 왔다.”


“미치게 감동했다, 방금.”
“…”




말없이 웃는 녀석. 이미 그런 점에는 익숙해졌다. 지유는 내 앞에서만 심장이 뛴다고 했지만, 정작 나를 길들이고 있는 건, 지유일 지도 모른다.

밝게 웃으며 교문으로 걷는 그녀가 마냥 사랑스럽다.


그나저나 나의 교사의 길도 머지 않은 건가. 아아, 아버지한테 그대로 잡혀가게 생겼다.
생각난 김에 엄마에게 전화나 드려야겠다.




젖지 않게 재킷 깊숙이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1번을 꾹 누르는 나.
신호가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낯익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너, 언제 내려올 거야?


“곧 갈 거예요.”
-아버지가 너 안 오냐고 계속 물으셔.


“나 가면 또 매타작이나 하실 텐데?”
-녀석두. 농담하지 말고 이번 주에 한번 내려와.


“네, 거기도 비와요?”
-당연하지, 봄비인데.


“나 지금 비 맞고 있는데.”
-미쳤어, 미쳤어. 감기 걸린다, 우산 쓰고 다녀.




엄마의 호통이 기분 좋게만 들린다.
봄비라서 괜찮아요. 따뜻해서 괜찮아요.

그리고 엄마 아들 지금 비 맞고 서울 시내 뛰어다니라 그래도,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괜찮아요.




“엄마, 사랑해요.”
-갑자기 왜 그래?


“그냥요, 낳아줘서 고마워요.”
-…그래. 이번 주에 꼭 오는 거다? 네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시니까.


“네.”




후, 이번 주는 아버지와 한판 해야 하는 건가? 전처럼 야구 방망이 들고 나를 맞이하시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거기다 제자까지 건드렸다는 걸 알면 날 죽이려 드시겠지.



이날 난 너무나 행복해서, 오래도록 비를 맞고 있어도 괜찮았지만, 곧 다시 내릴 차가운 비가 얼마나 날 아프게 할 지는 상상도 못했다.




* * *



“어딜 갔다 와?”
“학교.”

“나,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
“…알아.”




비에 젖은 채로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땐, 예상대로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안이 있었다. 내일 돌아간다는 말과 함께 나를 주시하는 지안.




“내가 가고 나면, 이 곳에서 더 이상 널 지켜줄 사람은 없어.”
“…”


“같이 돌아가자.”
“싫다.”

“왜? 그 선생 때문에?”
“…”




입을 꾹 다물었다. 지안은 내가 말 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항상 그랬으니까. 내가 말 없이 있어도 내 마음을 다 알아봤으니까.




“왜 나는 안 보는 건데? 13년동안 옆에 있던 난!”
“…친구라고…생각해.”

“…뭐?”
“친구라고 생각했다.”




넌 몰랐겠지만, 난 널 친구로 생각했다. 밀어낸 적도 없었고, 손을 건네준 적도 없었다.
지안은 벽에 기대 앉으며 내게 말한다.




“…난 이제 더 이상 널 지켜줄 수가 없어.”
“내 몸은 내가 지켜.”

“너 때문에 가령 그 선생이 위험해져도? 네가 지킬 수 있어?”
“…”




잊고 있었다. 내가 병기란 사실을.
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음을 잊고 있었다. 감정을 가져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박현중을 좋아하고 싶었다.




“넌 이곳에서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 하지만.”
“…”


“안전할 수는 없어. 이미 넌 G그룹이 비밀리에 만든 핵심 병기란 말이야.”
“그만.”


“제발 내 말 들어!!”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는 지안.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위잉_ 하고 천장에서 카메라가 이쪽을 향해 돌아간다. 난 스위치로 다가서서, 불을 꺼버렸다.




“지안.”
“제발…”

“난 이제 더 이상 네가 지켜줘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 난 오빠만 찾으면, 이 곳을 떠날 거다.”
“네 오빠…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G그룹에서 그렇게 투자한 너를 고작 그 정도에 놔줄 거라고 여겼어?”




놔주지 않으면?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비웃듯, 지안은 말했다.




“넌 이 곳에 들어온 이유가 너희 오빠를 찾아 준다는 약속 때문이었지만, 우리 아버진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으신 걸?”

“내 힘으로…”


“G그룹의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네 힘으로 어떻게 할건데?”
“…”




이토록 지안이 공격적인 건 처음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 다만 오빠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나랑 미국으로 돌아가자, 네 오빠는 포기하고 돌아가자.”
“내가 존재한 이유다.”


“알아, 하지만 난 네가 더 소중해.”
“…난 얼마 안 남았어.”


“알면서 왜 이래?!”
“소중하니까.”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럼 뭐하나.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였는 걸.
지안도 눈치챈 모양이다. 내 입에서 피를 토한 그날부터 천천히 능력이 저하되어가는 날.




“네 오빠…”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빠를 찾아주는 거다.”




그럼 난, 네 말처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박현중. 내 심장은 박현중한테만 뛰는데, 그렇다면 난 이 곳을 떠날 수 없다. 끔찍한 덩어리로 뭉쳐져 잠들어 있는 심장이…

박현중한테는 뛰고 있으니까.




“네 오빠라면.”
“…”


“이미 만났잖아.”
“…뭐.”


“넌 이미 네 오빠를 만났잖아.”




…눈 앞이 깜깜해져 온다.
불을 끄고 있어도 훤히 앞이 보이던 나인데, 지금은 온 세상이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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