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애

글/그림 :

에델바이스 [16]

나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6



안절부절.

지유가 병원을 빠져나간 순간부터 계속 초조함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해봐야 별로 좋은 건 못되는 구나.




"박현중!"




제길. 나쁜일만 겹친다고, 병원 입구에서 들어오며 나를 큰 목소리로 부르는 정춘자가 보인다.
이미 도망가기엔 늦었고, 저 여자 대체 양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망고주스 1년 치를 사온 모양이다.




"왜 나와있니?"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선배 일찍 오셨네요?"


"훗, 형렬이는?"
"여기 없다니까요?"




번쩍이는 눈. 이미 다 알고 왔다는 표정이다.


하하. 윤선배, 저도 이 여자 막을 힘은 없거든요? 전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요. 그러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하세요.

새삼 느끼는 건데, 세상살기 참 힘들다.




“윤형렬! 어디 있어?! 나와!”
“저, 병원에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윤선생님 지금 외진 나가셨어요.”


“데리고 와!”
“이봐요!”






뒤에서 떽떽거리는 정춘자와 뚱뚱한 간호사 아줌마의 목소리가 빈번히 들려왔건만, 난 지그시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은 뒤 유유히 병원을 빠져 나왔다.

이래나 저래나…난 모르는 일.




* * *



“회장님, 지유가 돌아왔습니다.”
“당장 올려보내.”




G 그룹의 본거지인 제너멀 오피스텔의 상층부. 그곳에서는 쟌 회장이 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쥔 그녀의 주먹은 이미 각오한 듯,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다.




“왔습니다.”
“…모두 나가봐.”




나가라는 그의 손짓에 큰 대리석 문이 닫히고, 회장실은 이내 고요함으로 가득찬다.
쟌 회장의 푸른 눈동자가 지유를 향한다.


아주 조금씩 떨리고 있는 지유를 보며, 그는 말한다.




“어딜 다녀온 거냐고 묻지는 않겠다.”
“…”


“네 스스로 나간 것은 아닐 테지?”
“…”




쟌 회장은 묻고 있었다. 누가 너를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간 것이냐고.
그리고 지유는 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위험해질 테니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푸른 눈동자의 외국인은 수많은 생명을 돈이라는 이유로 죽여온 사람이기에.




“왜 대답이 없지?”
“…혼자 나갔습니다.”


“그래?”
“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의 물음에 묵묵히 대답을 하고 있는 지유. 칼날 보다 예리한 쟌 회장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떨리고 있는 목소리를 그가 알아챌 수 없게 이 순간 지유는 빌고 또 빌었다.




“그 환자복은 뭐지?”
“…”


“그래도 혼자 나갔다고 말할 수 있나?”
“혼자 병원에 갔습니다.”


“네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면서?”
“…네.”




철썩.

찢어질듯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쟌 회장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하얀 뺨을 붉게 물들였다. 고개가 돌아간 채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지유.


아픔?


이제껏 겪어왔던 아픔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무디어진 고통에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네 존재가 한국 정보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걸 모르나?”
“죄송합니다.”




하얀 손등에 묻어나온 새파란 피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쟌 회장.




“넌 병기다.”
“…”

“평범한 인간들과 달라.”
“압니다.”

“푸른 피가 그 증거.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한국 정보원에 발각되는 즉시 너와 나는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다.”




인간 병기.

13년 동안 G그룹의 안에서 그녀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켜왔다.
지유에게는 보통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초능력이란 거대한 힘이 있었고, 그 능력은 곧 살인에 이용 되었다.




“나가봐,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날 시엔 용서 없다.”
“네.”




지유가 물러나자 마자, 찰칵하고 자동으로 닫히는 문. 가만히 문에 기대 서서, 자신의 손등을 바라본다. 파랗다고 하기엔 진한 보랏빛을 띄고 있는 액체가 손목을 타고 흐른다.


그녀는 인간 병기였다.
천재 킬러란 별명도 괜히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만큼 지유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금지된 약품을 사용한 인간 화학 병기 실험의 대상자. 세계 기업들은 그녀를 킬러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녀를 암흑가의 가해자라고 입모아 말했지만, 지유는 피해자였다.




“…허락된 거.”




방으로 돌아와 혼잣말을 되뇌는 지유.
감기 카메라 때문에 불을 꺼둔 방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직도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난다. 쟌 회장으로부터 맞은 뺨도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털썩,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는 몸.




“아직은 안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초능력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어제 일만 해도 그랬다.

텔레포트를 사용했을 때, 온 힘을 다해야만 했던 지유.




침대 하나, 감시 카메라 한대, 옷장, 커다란 전신거울을 제외하고는 텅 빈 지유의 방안. 싸늘한 공기마저 감도는 이 어두운 방 안에서 한번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어린 시절 잃어버린 오빠를 만난다는 그 일념하나로
13년을 이를 악문 채 버틴 그녀다.



킬러로서 항상 위험한 고비가 올 때마다, 주문처럼 되뇌던 말.
‘오빠’란 존재가 없었다면, 오래 전에 지유는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 아직은 안 되는데.”




어둠에 묻혀 조용히 말하는 그녀.




“우리 오빠 만나기 전까지는…안돼.”




이미 혈액의 색까지 변해버렸다. 얼마 전까지는 피를 토해도, 붉은 피가 나왔었는데 이젠 그 붉은 색 마저 사라지고 푸른 피가 흘렀다.

떨리는 손을 힘주어 쥔 채, 천장을 바라보는 지유. 꼭 쥔 작은 손에 오기가 서려있다.



‘조금만 더 버텨줘.’



라고 자신을 향해 당부하는 지유.



* * *



“거기 두분, 집에 언제 가실 겁니까?”
“투모로우!”




잔뜩 술에 취한 채, 남의 집 거실에서 곤드레만드레 뻗어있는 두사람.

누구겠는가?
나의 웬수 같은 대학 선배들이지. 하하. 내 인생에 요만큼의 도움도 안 되는 인간들.



투모로우? 제길. 지구가 멸망할 때 간다는 말인가?
소파에서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정춘자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아까부터 휴대폰만 죽어라 잡고 있는 윤선배.




“응, 여보 나, 오늘 늦게 갈 것 같아!”




…괜히 데려왔군. 왜 자꾸 사람 염장질이야!
윤선배의 휴대폰 저편에서 앳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어! 빨리 안 들어오면 나, 변기 물에다가 콱 머리 박는다!




어찌나 큰 목소리던지, 옆에 있는 내 귀가 멍하게 울린다.
변기물? 취향도 독특하시지. 누가 마누라 아니랄까 봐.


중얼중얼. 혼자서 열심히 험담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없이 비굴해지고 있는 윤선배가 보인다.




“안돼! 우리 애기는!! 여보 진정해!”

-지금 화장실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쏴아아_



“갈게!”

-30분 안에 날아와.




탁, 휴대폰 폴더를 닫더니 자켓을 집어 들고 벌떡 일어서는 윤선배다.
설마, 그 되지도 않는 협박에 굴하신 건 아닐 테지요?




“가시게요?!”

“응, 나 안가면 우리 여보가 변기 통에 머리 박는대!”



그 말을 믿어요? 정말 변기에 머리 박을 사람은 세상에 없다구요!




“진짜 박는 건 아니겠죠?”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질문 하는 나를 보며, 윤선배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진짜 박을걸? 작년 여름엔 덥다고 막 머리 삭발한다 그러길래 가만히 뒀더니 정말 삭발해버렸어. 멋지지? 정말 한다면 할 거야.”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윤선배와 결혼한 그 여성은 사이코가 아닐까.
그나저나 전화 온지 5분도 안되어 총알같이 튀어나간 윤선배.


제발 부탁이니, 가시는 길에 정춘자를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코까지 골아대는 정선배를 그대로 거실 소파 위에 놔둔 채, 방으로 들어온 나.
이불을 덮어 줘야 할 의무 따윈 못 느낀다.

얼어죽진 않겠지. 봄이니까.



지지직_ 거리는 TV를 끄고, 혹여 자다 일어나면 바로 날 향해 돌진해올 지도 모르니까 얇은 이불 한 장을 정선배 위에 덮어주고 방 안으로 향했다.




벌써 새벽 두시다.
봄이라서 그런가? 이상하게 밤이 밝아 보인다.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 보고 있는 나.
지유는 지금쯤 잘 도착했을까.



박현중, 단단히 빠져버렸나 보다. 자꾸 무표정한 지유의 얼굴만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걸 보니. 하아…엄마가 집에 들어오면 전화 달라고 하셨는데, 내일 할까?



서서히 눈이 감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눕자마자 잠이 든다.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다. 어제 그 거리를 무리해서 달린 탓일까, 난 1분도 안되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오빠.”




지유다! 허허, 이제 꿈에도 나오는 구나. 뭐 어쨌든 좋다.

한가지 이상한건, 꿈 속은 온통 흑백인데 지유만 하얀 원피스를 입은 컬러로 보인다는 거다. 아, 이런 게 상사병이라는 거구나.

근데 방금 너 뭐라 그랬어? 오빠?




“아무리 꿈이라지만 현중이라고 부르는 것 보단 배 낫다, 오빠라고 불러!”

“오빠.”




꿈 속이라지만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손을 뻗어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녀석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본다. 내 손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을 때, 지유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눈 앞에 나타난 어린 아이.




잠깐…나 왠지, 이 장면 익숙해.
낯익어. 눈 앞에서 울고 있는 꼬마 아이가.




“…누구니, 넌?”
“오빠아, 오빠 어디 있어…엉엉.




계속해서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어 어루만져 보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는 양갈래 머리의 꼬마아이.

커다란 눈동자에서는 하염없이 맑은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이상해. 자꾸만 가슴이 아파.




“네 이름은 뭐니?”

“…남희…유남희.”




잔뜩 목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아이다. 그리고 난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안 일어나?! 밥 줘!”
“…”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기는 눈부신 햇살과 검은 그림자.
당연히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정춘자였다.




“밥 달라니까!”
“저 원래 아침 안 먹어요.”

“나는 먹어!”
“어쩌라구요!!”




알 수 없는 꿈에서 일찍 깨어난 탓일까, 신경이 예민해져 버린 난, 평소에는 내지도 않던 신경질을 정선배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소리 질렀어?”
“하하…아뇨.”

“질렀잖아!”
“잘못했어요.”




이런 비굴한 내가 싫다. 결국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고 있는 나.
엄마가 가져다 주신 반찬도 이젠 다 먹어가는데.




“야, 밥 팍팍 퍼.”
“네.”

“그건 그렇고, 형렬이는 언제 나갔어?”
“새벽에요, 형수님이 부르셔서 잽싸게 달려가셨죠.”

“그래?”
“네.”




흠, 궁금증이 생겼다. 윤선배의 부인은 정말 변기에 머리를 박았을까.
변비인 자신이 먼저 화장실을 써야겠다며, 급하게 화장실로 향하는 정선배.

하아.


오늘은 학교에 늦게 도착할 것 같다.




“박현중!!”
“왜요? 화장실에서 부르지 마요.”

“휴지 없다!”
“…갖다 줄게요.”




내가 왜 저 아줌마랑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거야!

화장실 안으로 휴지를 집어 넣어 주고, 멍하니 오늘 꿈에 나타났던 아이의 이름을 생각해본다. 그냥 꿈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남희…유남희라.”
“뭘 중얼거려?”


“아, 그냥 신경 쓰이는 꿈을 꿨거든요.”
“지유 꿈?”


“지유라고 말한 적 없어요.”
“얼굴에 쓰여 있구만.”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그래도 끝에는 지유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어둡다 했더니, 창문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있다.




“비오냐?”
“네.”


“비오는 날은 학교를 가기 싫어.”
“늘 가기 싫었잖아요.”


“시끄러워.”




입이 찢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잔 말입니다.



주차장에서 빛이 번쩍이는 나의 소나타를 타고, 옆자리엔 시끄러운 정선배를 태우고, 학교로 향한다. 계속 옆에서 똥차라며 툭툭 치는 정춘자.




“제 소나타를 모욕하지 말아줄래요?”
“똥차보고, 똥차라는데 왜.”


“내려요!”
“어쭈, 죽을래?”




어떻게 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차 안에 하나 남은 우산을 고대로 쌔벼, 쓰고 간 망할 아줌마. 결국 자켓을 벗어 쓰고, 교무실까지 뛰어간 나다.




“박선생 늦었네요?”
“네에.”




토마토에 정성 들여 물을 주고 계시는 교장선생님의 눈길을 받고서 출석부를 들고, 재빨리 교실로 향했다.

그 정춘자만 없었다면 늦을 일은 없었을 텐데.



아파 오는 머리를 손으로 짚어가며 도착한 교실.
또 난리가 났구나. 누가 남녀공학의 쉬는 시간이 조용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지.


저 괴력의 소유자들은 과연 여학생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저 아이들은 과연 남학생일까.




“야야_ 제정신으로 돌아와.”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지 못해. 결석자 없지?”


“아, 지유랑 지안요.”
“하여간 문제를 안 일으키는 날이 없다니까?”




그러면서도 난 은근히 걱정이 됐다.
어제 병원에서 그렇게 나가버렸는데. 괜찮은 걸까.


굵어진 빗방울사이로 지유의 얼굴이 비친다.




“…기다릴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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