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15]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5
"네, 정선배 저 지금 병원이거든요? 학교에 말 좀 해주세요."
-왜? 어디 아프냐?
"지유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하루 꼬박 자네요."
-보호자 불러, 니가 왜 거기 있어?
"다 알면서 왜 물어요, 아무튼 학교에 그렇게 말해줘요."
-알았어, 근데 그 병원에 형렬이 있어?
다음날 아침, 병원 복도에서 정춘자에게 전화를 건 나. 지나가던 윤선배는
전화 통화의 상대가 정춘자 임을 알고 쉿, 포즈를 취한다.
병실 건도 있고 하니, 봐주지 뭐.
"없어요, 이 병원 아닌가 봐요."
-그래?
"네."
-그래, 알았어. 오후에 잠깐 들를게. 무슨 병원이니?
헉! 찾아오면 윤선배랑 마주칠 텐데.
살며시 휴대폰을 막고, 윤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오후에 온다는 데요?"
"뭐? 안돼! 죽어도 못 오게 해."
눈부신 외모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대는 눈 앞의 사람이 차마 가엾다 못해, 측은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각오를 했다.
"네.”
“짜증나, 나 정춘자 싫어.”
저도 싫어요.
짜증난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 하며, 차트를 옆에 끼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윤선배.
그 뒷모습을 보며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드는 나다.
후…난 청렴 결백한 남자라서 거짓말을 하면 목이 떨리는데.
“서울 지성 병원 103호실이예요.”
-그래? 응, 망고 주스 사간다고 전해줄래?
“네, 오후에 봐요.”
-그래.
후, 다행이다.
폴더를 닫고서 다시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들어가려는 내 귀에 언듯, 방금 전
정춘자의 목소리가 다시 재생되어 들린다.
‘망고 주스 사간다고 전해줄래?’
망고 주스는…윤선배가 제일 좋아하던 음료가 아닌가!
고로, 정춘자는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시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기는 나.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인데 윤선배 그냥 오늘 하루는
재수가 무진장 없었다 생각하세요.
아멘.
가만히 기도를 하고 병실 문을 여는데, 어느새 일어난 지유가 침대 위에
앉은 채,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검은 생머리.
왠지 그 눈부신 햇살 사이로 지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일어났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유. 멍하니 창밖만 쳐다본다.
“…너 입원해야 할 지도 몰라.”
“…”
“어떻게 할래?”
“싫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매몰차게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지유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여자라고는 처음 좋아해보는 건데, 왜 하필 저런 무신경에다가 무뚝뚝한 애를 좋아하게 된 거야?!
여자 복은 지지리도 없어요.
“뭐 좀 먹고, 누워 있어.”
“학교.”
“학교 가려고? 아직은 안돼.”
“…박현중은.”
“나? 난 안가도 돼, 오늘 어차피 수업 없었거든.”
”영어 수업이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 녀석한텐 나의 애교 섞인 거짓말 조차 통하질 않는다.
수업이 없긴 왜 없어, 한시간도 빠듯할 지경이지, 이 바쁜 몸께선 말이지.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몰라.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었어.
그냥 그러고 싶었어.
“밥이나 먹으러 갈까?”
“…아니.”
“너 빈 속이잖아,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던 하지.”
“난 밥 안 먹어.”
“그럼 빵 먹니?”
“…먹어본 적 없어.”
눈이 휘둥그레진 나. 빵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뭐야, 너 부잣집 공주님이었냐? 그건 아닌 것 같고.
거짓말 하는 것 같진 않으니, 나 혼자라도 밥을 먹으러 갈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궁금해 하지마.”
“왜 사람 말을 자르고 그래!”
“박현중 얘기는 재미 없으니까.”
“재미없긴 왜 없어! 내가 얼마나 유머러스한 사람인 줄 알아?”
“몰라.”
역시 지유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내가 얘랑 여기 계속 있어야 돼?
배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 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힐끗, 지유를 쳐다보는 나.
“정말 밥 안 먹을 거야?”
“어.”
“먹자아.”
“토 나온다.”
애교 섞인 나의 목소리에 지유는 정말 역겹다는 표정으로 날 주시했고, 그 시선을 피하고자 난 황급히 병실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아직도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저런 맑은 눈동자로 뚫어져라 쳐다보면 어떡하란 말이야! 그나저나 혼자 밥 먹는 거 진짜 싫은데.
병실 문에 머리를 기대고 서있는데,
뒤에서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살며시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지유의 검은 머리카락.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지유다.
“같이 있어준다.”
“뭐?”
“밥 먹는데, 같이 있어 준다.”
“…진짜?”
“거짓말 안 해.”
“가자!”
같이 가준다는 말에 바보같이 헤실 대는 내 얼굴을 때려주고 싶구나.
하얀 환자복을 입고 내 옆에서 천천히 걷는 지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살랑이는 봄바람 때문이 아니라, 걸음이 빠른 유가 내 걸음을 맞춰주고 있으니까.
하얀 환자복 하니까 생각났는데,
처음 만났을 때 이 녀석 입고 있던 옷이 하얀 끈 원피스였는데.
싸늘한 초봄이라서 인상에 깊게 남았지.
“…유야.”
“왜.”
“그냥.”
“밥이나 먹어.”
“우리 꼭 어디서 만난 것 같지 않냐? 나 처음 봤을 때, 낯익지 않았어?”
“전혀.”
시무룩. 난 우리가 꼭 전생에 헤어진 연인 같다, 뭐 이런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
이 녀석은 정말 냉정하다니까.
하지만 뭐 그런 점도 좋긴 해.
식당.
난 지금 먹음직스러운 비빔밥을 열심히 비비고 있는 중이다.
“유야, 이거 진짜 맛있는데 정말 안 먹을 거야?”
“현중아.”
“어?”
“밥풀 다 튄다.”
저건 입 다물고 밥이나 먹으라는 뜻이다.
제길. 제자한테서 이름 불리는 것도 억울한데, 저런 잔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꾸역꾸역, 맞은 편에 앉아있는 지유의 시선을 애써 피해가며,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 나.
내 바로 앞에서 턱을 괴고서 밥 먹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지유다.
아, 신경 쓰여. 평소처럼 못 먹겠다.
“왜 자꾸 쳐다봐.”
“불쌍해서.”
“뭐? 내가?! 왜 불쌍해?”
“그냥.”
싱긋, 미소로 대신하는 지유.
아아, 그거면 됐다. 웃는 건 정말 보기 힘든 녀석이니까.
다시 뿌듯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부지런히 입으로 옮기고 있는데, 빤히 쳐다보고 있던
녀석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그거 맛 있나?”
“…이거?”
“여기 그거 말고 뭐 있나.”
“먹어 볼래?”
“…”
언젠가 지안 녀석이 내게 말했었지.
저 녀석에게서 침묵은, 긍정의 표시라고.
난 이 상황을 신기해 하며, 숟가락 가득, 밥을 퍼 지유의 입가에 가져다, 주었다.
잠시 주저하며 숟가락을 쳐다보고만 있는 그녀.
“뭐해? 먹어.”
“…”
“맛있다니까? 독 안 탔어.”
“이게 뭔데?”
“비빔밥도 모르냐?”
“…”
조금씩 입을 벌리는 지유. 아, 하고 입을 벌리자마자 냉큼 숟가락을 집어 넣었다.
갑자기 또 거부할 지도 모르니까.
지유의 입 안에서 머물러 있던 밥알이 조금씩, 씹히는 가 싶더니, 이젠 천천히 밥을 삼키는 지유다. 또 바보같이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이렇게 좁혀가는 건가?
그거보다, 간접키스 구나.
또 어느새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나.
“매워.”
“원래 비빔밥은 매워야 돼.”
“안 먹어.”
“더 줄 생각도 없었어!”
사실은 몇 숟가락 더 먹이고 싶지만, 금새 맵다고 연신 물을 들이키는 지유 때문에 그럴 순 없다.
계속해서 물을 홀짝이는 지유.
박현중, 콩깍지가 씌어도 아주 단단히 씌었구나.
저 모습마저 귀엽다고 느끼다니.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식당 안으로 휑하니 불어왔다.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따뜻한 산들 바람이 불었었는데.
“…아무래도.”
“응? 더 줄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바람이 불어온 쪽을 향해 중얼거리는 지유다.
“나, 가봐야 할 것 같다.”
“뭐? 안돼.”
“…부르고 있어.”
“누가?”
핏기 없는 얼굴로 피식, 나를 향해 떨어뜨리듯 웃어 보이는 지유.
그러더니 휙, 빠른 걸음으로 식당 출구로 걸어간다.
앗! 어딜 가!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업고 왔는데!
먹던 것을 놓아두고, 재빨리 지유가 나간 쪽으로 뛰었다. 진짜 그 녀석 걸음 하나는 빠르다.
죽을 힘 다해 뒤쫓았건만,
벌써 병원 정문을 통과하고 있는 지유의 하얀 환자복 끝 자락이 보일 뿐이다.
“후…저 녀석 또 어떻게 데리고 오지?”
그 끔찍한 빌딩 안으로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은데.
멍하니 열렸다, 닫히는 자동문 앞에 서서, 지유가 사라져 간 곳을 쳐다보고 있는 내 어깨를 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스르륵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얼굴 하나는 윤선배.
“뭐하고 있어? 혹시 정신병이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흠, 세부 검사 결과가 나와서 알려주려고, 예쁜 앤 어디 갔어? 병실에 없더라?”
“…도망갔어요.”
“술래잡기해? 언제 도망갔어?”
제발 진지해지란 말입니다!
엉엉, 생각 같아서는 이 대책 없는 의사 선생을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 도망갔냐니까?”
“방금요.”
“잡아와.”
“무슨 수로요.”
“급하단 말이야.”
“대체 검사 결과가 어떻길래 그래요?”
저 대책 없이 아방한 얼굴에서 진지함이 묻어 나온다.
뭐야? 정말 심각한 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선배를 쳐다보는 내게 그는 말했다.
“심장에 화학물질이 섞여 있어.”
“…화학물질요?”
“응, 이런 곳에서 말하기 뭐하니까, 내 방으로 들어와.”
“네.”
타닥타닥, 병원에서 뛰지 말라는 간호사의 충고가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또 뛰어버렸다.
덜컥하고 진료실의 문을 열어 제친 나.
그런 내 앞에 웬 사진을 꺼내 놓는 윤선배.
“이게 어제 그 사진 확대도야.”
“…뭔데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화학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건 확실해.”
왼쪽 갈비뼈 사이로 네모난 쇠붙이 같은 것이 보인다.
정말 이런 게…사람 몸 속에 있을 수 있어? 그것도 심장에?
이것 때문에 걔가 아픈 거야?
“이게 원인인가요?”
“응, 그런데 신기한건 이 물질이 심장과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거지.”
동화란 말은.
이미 심장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럼 제거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현재로서는 그래.”
“어떻게 해야 돼요?”
“현대 의학의 길은 멀고도 멀었어.”
이봐요, 그 말은 지금 당신이 할 말이 아니라구요!
왜 하필 의사가 이 모양인 인간이 걸려서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사진을 주시하는 나를 보더니 다시금 말을 잇는 선배다.
“그앤 괜찮을 거야.”
“어떻게 압니까?”
“이런 게 심장 중심에 박혀있는 데도, 그 아인 살고 있으니까.”
“네?”
“보통 사람이면 죽었을 거라구, 한참 전에.”
“…”
역시 지유는 평범한 여학생이 아니었던 거다.
심장에 이런 걸 박아두고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여자아이.
“어떡하죠, 선배.”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저… 너무.”
“너무 아퍼? 어디가?”
…
“위험한 사람 좋아하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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