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14]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4
하아...하아,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이상 앞이 안 보일 즈음에
내 앞에 큰 종합병원이 나타났다.
“유야…? 지유야? 병원 다 왔어.”
“…”
“눈 좀 떠봐.”
“…”
기절한 지 조금 오래됐는데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이 밀려 온다.
이미 바닥난 체력이지만 난 다시 달렸다.
빨간 글씨가 적혀있는 응급실로.
“저기요! 응급환자인데요!”
“어떻게 오셨죠?”
“애가…갑자기 쓰러졌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나와는 달리 침착한 간호사.
이런 일은 늘 겪어봤다는 듯, 나를 침대 쪽으로 안내한다.
젊은 의사가 다가오더니 지유의 도복 안으로 청진기를 넣어 본다.
“괘…괜찮은가요?”
“일단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상태가 위급한 건 아니니, 내과로
가보세요.”
“내과요?”
“예.”
내과라…겉으로는 다치지 않은 것 같긴 하다.
자세한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다른 곳으로 지유를 옮기는
간호사들. 이제야 안도의 숨을 쉬는 나.
대기실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내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게 누구야?!”
“어!”
나와 같은 격투 동아리 선배다.
반가운 듯 다가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선배가 반갑기가
그지 없구나.
새하얀 피부에 천진난만한 미소.
백설왕자를 연상케 하는 남자. 가만 있자,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데…
힐끔, 의사 가운을 향하는 내 눈동자. 녹색 글씨로 ‘윤형렬’ 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로!
우리 대학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윤형렬이 아닌가!
22살에 코 꿰여서, 유부남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안녕하셨어요?”
“그래, 춘자는 잘 지내?”
“하하, 왜 저한테 물으세요.”
“너희 둘 사귀는 거 아니었어?”
“절대 아니죠. 하하.”
그 인간이야, 늘 잘 지내죠.
참고로 눈 앞의 이 백설왕자는 나의 지독한 악연인 정춘자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여전히 천진난만한 웃음을 가지고 계시네요.
해맑은 미소에 뻑 간 여자가 한 둘이 아닐 텐데.
“그나저나 병원엔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 제가 아니라, 학생이 아파서요.”
“맞다! 현중이 선생님이었지.”
“예에.”
하하… 아닌 것 같지만, 저 선생 맞습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는 윤선배.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간호사들이 휘청 휘청, 쓰러진다.
난 개밥의 도토리가 된 기분이랄까?
“선배, 저 지금 대기실 지켜야 하는데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여기 대장이야.”
대장이라는 건, 이 병원 원장이라는 건가? 엑 그건 아닐 거고,
이 병동 책임자란 건가? 에이, 몰라.
“그럼 방금 응급실로 실려왔던 애가 네 학생이야?”
“네, 상태는 어때요? 많이 심각한가요?”
“응.”
이봐요, 대책 없이 솔직해지지 말란 말입니다!
보통 의사라면 ‘많이 심각하진 않아’ 라고 말해주는 게 정상 아닙니까?!
진료실로 날 부르더니 앉혀놓고는 황당하게 만드는 이 사람.
“여기를 봐봐. 그 애의 X-ray 거든?”
“저 이런 거 봐도, 뭐가 뭔지 모르는 거 아시잖아요.”
“응, 알아. 그냥 보기만 해.”
윤형렬. 이 인간 여전히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데 선수구나.
이미 오래 전에 면역이 된 나이기에 허허, 웃으며 하얀 빛을 받고 있는 X-ray를 쳐다본다.
이게 갈비뼈일 테고…이게 그럼 심장인가?
얼라, X선은 뼈만 나오는 거 아닌가?
의학 쪽에는 관심도 없는 나였으니, 알 리가 있나.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혀를 차는 윤선배.
“아무것도 모르면서 보면 알아?”
“…”
무안해져 버렸다.
내 시선이 향하고 있던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선배는 말했다.
“여기 이건 심장이 아니거든?”
“네, 저도 심장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사실, 심장인 줄 알았습니다.
엥? 그럼 저게 심장이 아니고 뭐야?
뭔가 불길한 예감이 감싸온다.
“심장이 아니면 뭔가요?”
“…모르겠어.”
“의사 맞아요?”
“의사라고 해서 모든 걸 안다는 편견을 버려.”
“이 정도는 알아야지요!”
“시끄러워.”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척 올리며,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 심장 부근에 이상한 게 박혀있어. 그런데 분명히 말하건 데, 이건
심장은 아닌 것 같아.”
“심장은 아닌 것 같다…그럼 뭐예요?”
“나도 모른다니까?”
“이 병원 원장 선생님 불러올까요?”
“협박하지마.”
답답하니까 그렇죠!
생각 같아선 고함이라도 버럭 지르고 싶지만, 여긴 병원이다.
눈 앞의 이 인간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 있다.
“결론은 뭐예요?”
“입원시켜. 내가 꼭 원인을 알아낼 테니까.”
저야,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데 본인이 죽어도 싫다는 데 어떡합니까?
여기까지도 정말 우여곡절 끝에 데려온 거라구요.
“많이 심각해요?”
“응.”
“그냥 과로라던가…뭐 그런 건 아니구요?”
“니가 의사야? 왜 의사 말 안 들어?”
“들을게요.”
무서워.
저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이 언제 내 이마로 날아올 지는 모르는 일.
정춘자나 윤형렬이나,
난 대체 왜 이렇게 못돼먹은 선배들 밖에 없는 거야!!
내가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선배는 없는 건가?!
그 놈의 격투 동아리 따위는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어쨌든 내가 자세한 검사 뒤에 말해줄게, 103호실이야.”
“네.”
“아, 맞다!”
“?”
“이거 봐봐.”
“그게 뭔데요?”
품 안에서 웬 사진 한 장을 꺼내 드는 윤선배.
얼마나 간직하고 있었으면 저렇게 될까.
꼬깃꼬깃한 사진 한 장. 그리고 그 사진 안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학생이 환하게 웃고 있다.
여동생인가?
“여동생이예요? 예쁜 건 아니지만, 괜찮네요.”
“우리 솔영이가 어때서! 예뻐!”
“그새 미의 기준이 바뀌신 겁니까? 그래요, 선배 동생 예뻐요.”
“우리 마누라야!”
…내가 선배 말을 듣고 나서 생각난 단어는
로.리.콤.
원래 특이한 인간인건 알았지만, 고등학생하고 결혼할 만큼 변태로 생각하진
않았는데. 오, 맙소사.
“하하…부인이 고등학생인가 봐요?”
“아니, 나랑 동갑이야.”
“…”
“어려 보이지?”
엄청요.
그럼 그 결혼했다는 상대가 사진 속의 여인네란 말인데.
뭐야아, 자랑하려고 나를 부른 거였나. 안 그래도 지유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별 인간이 다 열 받게 하고 있어?!
쾅! 있는 힘껏, 문을 닫고 나왔다.
천천히 지유가 있는 병실로 걷는 나다.
“103호실…여기구나.”
의사 선배 빽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떡하니 1인실을 주니 말이다.
문 밖에 적힌 지유 라는 이름.
달칵 혹여나 잠들어 있을까 싶어,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예상대로 가습기가 나오는 병실에서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는 지유가 보인다.
녀석, 곤히도 잠들었군.
“…유야.”
“…”
아무래도 내가 너 많이 좋아하나 보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자꾸 뛰니까.
거기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는 데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등에 업힌 사람이 너라는 걸 생각하니, 힘든 줄도 몰랐어.
사실이야.
“대체 어디가 아픈 거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지유.
살며시 손을 뻗어, 창백한 뺨을 만져 본다.
어서 깨어나.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넌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그 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제너멀 오피스텔
“지유가 도망쳤어?!”
“네.”
“헛소리 하지마. 그 아인 오래 전부터 세뇌교육을 받아왔어! 이제 와서 왜?!”
“…만났거든요.”
“뭐? 누굴 만나?!”
“그런 사람이 있어요.”
30층 빌딩의 꼭대기에 위치한 회장실.
검은 커튼으로 인해,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이 곳에서 쟌 회장과 그의 아들
지안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유와 박현중이 사라진 그 때부터 계속 울리고 있는 경보음.
“애애애앵___”
“당장 경보음을 끄라고 말해!”
“…네.”
명령을 내린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빌딩 전 구역에서 울리고 있던 경보음은
뚝, 하고 그쳐 버렸다.
쟌 회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물론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세계 최고의 살인 청부 업자. 그 타이틀은 쟌 회장의 것이었다.
무표정한 지안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는 쟌 회장.
“내가 널 왜 지유의 옆에다 놔뒀다고 생각하나?”
“…감시하기 위해서요.”
“잘 아는 군, 아는 놈이 이런 짓을 벌여?”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야? 이 곳에 누군가라도 들어왔단 말인가?”
“…들어올 수는 있었죠, 어떻게 나간 건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
“아까도 말했듯이 지유는…만났거든요.”
당신의 명령만 듣던 천재 인간 병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거든요.
아마 끝까지 행복하진 않을 테지만.
“너에게 더 이상 그 임무를 맡기지 않겠다.”
“네?”
지안의 놀란 두 눈.
지금 쟌 회장, 그가 말하고 있는 건 말 그대로 지유를 감시하고 있던 일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13년동안 감시란 명목하에 그녀를 지키고 있던 지안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넌 내일 즉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싫습니다.”
“…내 말을 안 들을 작정이냐?”
“제가 가고 나면, 지유를 어떻게 하시려구요?”
“더 이상 병기에게 감정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아뇨, 지유는 마지막에는 이 곳으로 돌아와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곳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는 걸.
G그룹에는 그녀가 버리지 못하는 단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유는
그 것때문이라도, 마지막엔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유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있잖아요.”
지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그녀는 선생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으로 향했을 것이다.
박현중이라는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기에.
하지만 단 하나,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이 곳에서 빠져나간 거지? 틀림없이 내가 나간 후 바로 경보음이 울렸는데?’
비상 계단으로부터 주차장 출구 까지는 적어도 15분은 걸리는 거리다.
그 거리를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설마.’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지유와 자신의 나이가 10살이 다 되어갈 무렵, 순간이동과 공중 부양 능력을
배우게 했던 아버지.
결국 평범한 인간의 몸이기에 높이 뛸 수 있는 것이 한계였던 지안.
하지만 몸 속에 초능력이 주입되어 있던 지유는 달랐다.
그녀는 공중에 뜰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텔레포트’ 까지도
해냈던 거다.
“…안돼, 지유야.”
그러면 네 몸이 더 망가져버려.
돌아온 자신의 방 안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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