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12]
#12
"거봐, 넌 지금 사랑에 빠진 거라니까?"
"아니라니까요."
"웃기지마. 지금 누굴 속이려고 해?"
그야 노처녀 정춘자 선생님을 속이려고 하는 중이지요.
아까부터 계속 끈질기게 나의 하트를 받은 학생이 누구냐고 물어오는 정선배.
내가 미쳤수? 그걸 가르쳐 주게.
가르쳐줬다간 지유는 하루종일 저 인간한테 시달려야 할 지도 모른다.
"야, 근데 너 짤리면 어떡해?"
"다른 데 취직하면 되죠."
“아주 막 나가기로 결심한 모양이네, 박현중.”
“늦게서야 깨달은 만큼 막 나가야죠.”
“한가지.”
“?”
“네 감정에 이끌려서 애 상처주거나 하지는 마.”
“…그런 일 없어요, 그냥 지켜만 볼 거니까.”
지켜만 보는 겁니다.
아직은 그녀석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니까요.
타들어 가는 담배 연기가 내 마음을 대신해준다.
그리고 내 마음을 알게 된 이순간이 험난한 길의 시작임을, 난 알 수 없었다.
"선생님."
멍하게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 귀에 날 부르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스윽,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지안이 서있다.
음침한 녀석.
"어, 왜?"
"지유 조퇴했어요."
"뭐? 허락도 없이? 이런 괘씸한."
"..."
괘씸하잖아, 이 녀석.
...아까 일 때문에 사과하려고 그랬는데 그냥 가버리면 사과할 기회도 없어지잖아.
그나저나 내 옆에 서있는 이 희멀건 녀석은 왜 안가는 거야.
난 나보다 하얀 피부를 가진 녀석이 내심 짜증났다.
이래봬도 백옥이란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인데.
"넌 왜 안가?"
"전 수업을 받아야죠."
평소처럼 여유 만만한 미소로 대신하는 지안.
녀석의 금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인다. 이 참에 나도 확 금발로 염색이나 해볼까?
아아, 그랬다간 교장 선생님께서 가만히 안 있으실 테고.
"야, 너 아까 그 말 사실이야?"
"무슨 말요?"
이 참에 난 녀석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을 질문하기로 했다.
"지유 약혼자라는 거."
"아아..."
"거짓말이지?"
"아뇨."
아악, 거짓말이라고 말해! 널 향한 지유의 눈동자는 약혼자를 보는 눈동자가 아니었어!
활활 타오르는 이 오라는 질투라고 해두겠다.
빤히 녀석을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 나.
그걸 즐기는 듯, 내 옆에 걸터앉는 지안.
"수업 종 쳤어."
"알아요."
"안 들어가?"
"선생님 들어가시면요."
"너나 지유녀석이나 둘다 똑같이 건방져, 그거 아냐?"
"알아요."
묘하게 기분 나쁘네.
건방진걸 알긴 안단 말이지?
담배 연기를 깊게 내쉬는데, 옆에서 빤히 날 쳐다보는 지안의 시선이 느껴진다.
"뭘봐."
"저도 한대만 줘보실래요?"
"미쳤어?"
"아뇨, 제 정신이예요."
"자."
허약하게 생긴 녀석이 무슨 담배야. 피울 줄이나 아냐?
라는 심정으로 내밀어 준 담배 하나.
그러나 녀석은 아주 익숙한 행동으로 라이터를 켜더니 이윽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떡하니 벌어진 나의 입을 보더니 지안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왜요, 담배도 못 피는 범생이로 보였어요?"
"어, 솔직히 말하면 그래."
"솔직해서 좋네요."
"좀 더 솔직해 지자면, 난 네가 싫어."
"동감이에요."
뭐라?!
황당한 눈동자로 녀석을 보자, 지안은 싱긋 웃으며 담배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서 일어난다.
"야, 이 녀석아! 내가 왜 싫어?!"
"저도 묻죠, 제가 왜 싫으신 겁니까?"
거야, 매일 지유랑 같이 있으니까...지.
"그건!"
"선생님하고 똑같은 이유로 싫어요."
뭐? 나랑 같은 이유라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건만, 또 한번 묘한 웃음으로 넘어가는 지안이다.
어쨌든 미워할 수는 없는 녀석.
"...유야, 그래도 말은 하고 가야지."
이래도 담임이란 말이다.
날 허수아비로 보지 말라고. 안 그래도 교장 선생님한테 찍혀있는 마당에.
은근히 난 중간에 돌아가버린 지유에 대한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후, 한번 더 그 무시무시한 빌딩 안을 들어갈 수도 없고
난 목숨이 두개가 아니니까.
* * *
같은 시간, G 제너멀 오피스텔.
"네 초능력은 함부로 쓰라고 만들어 준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아직도 감정 제어를 못하나?! 네 초능력 파장이 한국 정보원에 잡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
"..."
"내일부터 학교에 갈 필요없다."
"잘못했습니다."
"뭘?"
서릿발 같이 내리 꽂히는 차가운 음성.
그 음성의 주인공의 G그룹의 총수 쟌 회장이었다.
어둠 속에서 뚜렷하지 않은 그의 실루엣이 지유를 다그치고 있었다.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보내주세요."
"뭐?"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하?"
기가 찬 듯, 웃어 보이는 쟌 회장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는 지유.
그녀에게 더 이상 학교를 가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하지만 지유는 자꾸만 눈에 아른거리는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뭔가."
쟌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이유.
그녀에게 특별한 이유란 없었다. 다만,
바보 선생 하나가 자꾸만 눈에 밟힐 뿐이다.
오늘도 그 누구보다 감정 제어를 할 수 있다고 믿어 온, 그녀가 초능력을 사용한 것은
아마도 한 사람이 이유였으리라.
"이유는...없습니다."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네."
"초음파 실로 가라."
초음파 실은 지유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였다.
끊기지 않는 뇌파가 머리를 죄어오는 고통을 주는 장소.
어릴 적부터 초음파 처벌을 받아 온 그녀에게 이번 처벌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뚜벅 뚜벅, 복도 저 끝에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는 지유.
"박현중."
가만히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어 보는 그녀다.
"박현중 옆에 있으면..."
홀로 서 있는 복도에 작게 울리는 지유의 목소리.
아무도 듣지 않았기를.
"심장이 운다."
오늘 낮에 그의 고함소리에 화가 났었던 자신.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중요한 임무를 잊을 정도로.
'넌 선생이 만만하게 보여?! 왜 말끝마다 반말이야? 내가 네 친구냐?!'
한가지는 확실했다.
오늘 자신이 화난 이유는 박현중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은 알 지 못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하고 아픈 길인지,
자꾸만 눈에 밟히는 박현중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 * *
"어쭈구리, 무단 조퇴에 무단 결석?"
다음날 교실에서 난 지유를 볼 수 없었다.
어디 아픈 건가? 또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있어.
2교시 영어 수업.
평소와 마찬가지로 15분을 자습시간으로 남겨두고, 멍하니 교탁 위에 턱을 괴고
있는 내 눈에 맨 뒤, 비어있는 두 자리가 보인다.
지유 옆자리의 빈 자리는, 아마도 지안 일테지.
그때 드르륵, 하고 열린 교실 문.
모자란 수면을 취하고 있던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으로 착각하고서 화들짝 일어났고,
멍하게 교탁에 턱을 괴고 있던 난 천천히 문을 향해 돌아봤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지안이었다.
넥타이는 풀어 헤친 채, 가방은 어디다 두고 온 겐지, 빈 손으로 뚜벅 뚜벅
천천히 내 앞을 가로 질러 자리로 들어가는 녀석.
어쭈, 지금 네가 나를 능멸하였어?
“야, 이 녀석아 인사도 안 하고 들어가냐?”
“안녕하세요.”
그제야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발걸음을 돌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지안.
흠, 용서해주지.
“지유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혼자 왔어?”
“아파서요.”
나보다 저 녀석이 지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분 나쁘다.
아파서요, 라는 말을 간단명료하게 하고 나서, 다시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지안.
절뚝절뚝 걷는 모양새를 보니, 저 녀석도 어딘가 아픈 게 틀림없다.
“너 다리는 왜 그래?”
“오다가 삐었어요.”
“그래? 그럼 이따 양호실 가봐.”
“네.”
웃기고 있네, 삔 것 같지는 않은데.
나를 두 번 능멸하였어, 넌.
어찌 됐던 본인 스스로 밝힐 의지가 없어보이니, 난 잠자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생사가 달린 중대한 결심을 했다.
“…후우, 박현중 두 번 죽겠네.”
* * *
이날 밤.
거대한 G 제너멀 빌딩 담장을 몰래, 몰래 넘고 있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정일 고등학교 2학년 영어 교사 박현중이라고
감히 난 말할 수 없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또 들어온 것이냐.
내가 죽으면 꼭 전지현씨 집 근처 뒷산에 묻어주오.
지난 번에 지유가 가르쳐 준 지하 주차장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박현중 효도도 못하고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르겠군.
진작에 군대도 다녀올 걸.
아아, 미리 말하지만 난 병역을 면제 받은 사람이다. 우리 집이 남들보다
부유하다 해서 있지도 않은 병으로 면제 받은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두통이 원인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깟 두통 때문에 면제를 받느냐고 말이 많지만,
내 두통은
한 때, 아주 심하게 정신착란 증세까지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정신병의 일종이었다.
나도 나라를 지키고 싶었어!
뭐 싸움은 남한테 져본 적 없지만 그래도 역시 병역 면제는 어딜 가나
환영 받지 못하긴 했지만.
뭐 지난 일은 이쯤 접어두고,
지금은 깍두기들의 눈을 피해 지유를 만나는 게 먼저다.
제발 지난 번 그 장소에 있어다오.
두근 반, 세근 반,
26년 인생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 거린 적은 처음 이노라고
감히 난 말하겠다.
“OK, I will be back.” (그래, 다시 올게)
지하 주차장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외국인이 이어폰을 통해
대화를 하더니 이내 흰 리무진을 타고 슝, 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지하주차장 안으로 들어 온 나.
흠, 다시 온다고 했으니 빨리 얼굴만 보고 나가야겠군.
이럴 땐, 전공이 영어라는 게 꽤 도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박자박, 조심스럽게 비상계단으로 들어온 나.
비상계단까지는 나의 날렵한 몸을 믿고 들어왔다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비상계단은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층계를 밟는데, 저 위에서 날 드리우는
그림자가 있다.
아아, 죽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반갑기 그지 없는 얼굴 하나.
“…뭐하세요?”
지유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참 안타깝구나.
아직 갈아입지 않은 교복차림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안.
녀석의 표정은 그야말로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로선 너도 반가운 건 아닌데.
“아하하하, 가정 방문이란다.”
“정문으로 오시던가요.”
“스릴을 즐겨야지.”
“스릴 두번 즐기다간, 사람 잡겠네요.”
누가 누굴 잡아? 나를?
아직 장가도 안간 나를?
“그렇지?”
비굴해지는 나의 태도.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나의 최대 무기인 살인미소도 이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씨익 웃어봐야, 돌아오는 건 황당한 표정 뿐이다.
“그럼 조심해서 가시고, 내일 학교에서 뵐게요.”
“가려고?!”
“네.”
“나는 이대로 돌아가란 말이야?”
“그럼요?”
돌아가지 않으면 어쩔거냐, 라는 녀석의 물음.
건방지기 그지 없건만 난 누구보다 더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래?”
“…”
“뭐 싫으면 말고.”
“싫어요.”
제길. 넌 이런 아이였어. 못된 녀석.
영어 수행평가를 모조리 깎아줄 테다.
아랫 입술을 꽉 무는 나를 힐끗 보더니, 위를 향해 올라가는 지안.
나를 데려가거라아!
가슴 속 외침은 밖으로 도무지 튀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녀석의 발소리 멀어지는 가 하더니, 뚝 하고 멈춰 버렸다.
엥? 나를 데리고 가려고?
“선생님.”
회전 계단의 저 위쪽으로부터 지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이 계단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야, 저번에 왔을 때 지유 녀석이 날 이리로 내보내줬으니까 알지.
아, 내가 지난 번에 온 건 비밀이었지.
“여기가 제일 잘 보이더라고.”
“…유가 가르쳐줬어요?”
어느새 타닥 타닥,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서있는 지안.
무서운 녀석.
예리한 눈빛으로 내 눈동자를 노려본다.
“그래.”
“…선생님은 지유 만나러 오신 거겠네요.”
“아니라니까?”
“이 계단 끝이 지유 방이니까, 거짓말은 안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아 그랬어?
더 이상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나. 조심스럽게 녀석의
표정을 살피는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흥, 질투하냐?
근데 이 계단 끝이 지유 방이면, 여기서 내려온 너는 뭐야!
비굴에서 질투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
“지유한테 관심 갖지 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내 맘이다 왜!”
명색이 교사라는 인간이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냐고 말해도
할말은 없지만, 그만큼 내 감정은 진지했다.
알아?
자꾸 걔가 눈에 보일 때마다 심장이 아파오는 이유.
네 녀석이 안다면, 관심 끊을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우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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