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11]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11
언젠가 들은 바가 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
벌써부터 난 등 뒤가 오싹하게 저려왔다.
화났을까? 아냐, 아냐. 걔가 화나던 말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침내내 교무실에서 머리만 벅벅 긁어대고 있는 나다.
아씨, 내가 사과해야 되나?
난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아주 큰 잘못을 한 것만 같다.
그때 우리반 실장 녀석이, 안경이 코 아래까지 내려올 만큼 헐레벌떡
뛰어와 교무실 문을 열고 외친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왜?”
아, 또 무슨 일이야?
기집애나 사내놈들이나 하루도 무사한 날이 없어요.
또 싸움이 일어난 거라 단정짓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는 나.
하지만 실장녀석의 다음 한마디에 난 그대로 교실로 미친 듯이 뛰어가고야 만다.
“보희…! 보희요! 보희 손에서 불이 났어요!”
이 자식들이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교실을 향해 달리는 두 다리에는 바짝 긴장감이 더해져 빨라진다.
2분 뒤 도착한 교실에서는 양호실로 실려갔다는 보희와 아직도 그 소동을
짐작케 하는, 살 타는 냄새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몰라요, 갑자기 보희가 지유를 때리려고 손을 들었는데 불이 붙었어요.”
평소 보희와 친하게 지내는 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차근히 말했다.
누굴 때려?
“지유는 왜 때리는데?”
“아침에 그냥 얘기 나누다가…”
“무슨 얘기.”
“아뇨, 그냥 소풍 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무슨 일인지 예상이 간다. 소풍 날,
롤러코스터 앞에서 쥐 잡아 먹은 듯한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보희가
머리 속에 두둥실 하고 떠올랐다.
그냥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결국 일을 치르는 구나.
그런데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잖아?
불은 대체 어떻게 났다는 거야?
내 시선이 맨 뒤 창가, 지유의 자리로 머물렀다. 엎드려 있는 지유.
날 쳐다보는 지안의 눈동자.
“보희는 많이 다쳤어?”
“아, 다행히 심하지는 않대요.”
“병원 데리고 갔다 올 테니까, 오늘 종례 없다.”
“네.”
지유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입을 굳게 닫고, 보희가 있다는 양호실로 급히 뛰어가는 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지안의 눈동자가 거슬린다.
양호실
드르륵_
문을 열고 들어선 양호실에서는 물씬, 소독약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서 오른손은 붕대로 칭칭 감은 채, 울고 있는 보희가 있다.
“으구, 녀석아 교실에서 그러게 불장난은 왜 해?”
“저 불장난 안 했어요! 가…갑자기 불이 났어요.”
“다시 말해봐 봐, 천천히.”
“제가 그 기집애를 때리려는데 화르륵, 하고 제 손등에 불이 붙었단 말이에요!”
“마법이라도 쓴다 이 말이냐?”
“전 아무튼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엉엉, 다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는 보희.
아아, 이래서 난 우는 여자가 제일 싫어.
그나저나 무슨 불이라는 건지.
난 아직까지 아이들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이 어떻게 나? 무슨 인체분화라도 일어난 거야?
“병원 안 가도 되겠니?”
“집에 가서 쉴래요.”
“흉터 남으면 어쩌려고.”
“이 정도로 흉터 안 남아요.”
결국 조퇴할 심산이었군. 저벅 저벅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걸어가는 보희다.
스윽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를 으쓱 이는 양호 선생님이 계신다.
“정말 괜찮나요?”
“예,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던 걸요.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후, 교장 선생님께 먼저 알리고 오세요. 소화기라도 늘려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불꽃이라.
지유를 때리려고 하자마자, 불꽃의 보희의 손목에 달라 붙었다…?
무슨 초능력이라도 부린다는 거야?
말도 안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걸어가는 도중.
언제 나타난 건지, 스르륵 내 앞에 서 있는 지유 때문에 깜짝 놀라는 나다.
“놀랐잖아.”
“…내가 그런 거예요.”
“뭐?”
“불, 내가 그런 거예요.”
난 잠시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그걸 네가 그런 거라고?
할말을 잃은 채 녀석을 쳐다보는 나.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가는 그 애.
“잠깐만!”
뒤 돌아서 가는 녀석을 불렀다. 내 부름에 제 자리에 서있는 지유.
재빨리 그녀의 앞으로 뛰어가 눈을 마주했다.
“네가 그런 거야?”
“네.”
갑자기 적응이 안 된다. 만날 ‘어’ ‘아니’로 통일하던 녀석의 입에서 네, 라는 말이 나오다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지유.
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한 건데?”
“…”
“네가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마. 오늘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제가 그런 거 맞아요.”
딱딱한 지유의 목소리. 원래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느낌상 더 차가워진 것 같다.
난 눈 앞의 이 아이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겨울도 아닌 이 따스한 봄에 화재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도 아무런 장치도 없이 어떻게 타인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인가?
“후, 나머지는 마치고 얘기 하자.”
“…”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향해 걸어가는 지유.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의 긴 머리가 그 뒤를 따라간다.
…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만 같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지안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어?”
빙글 뒤를 돌아보니 언제 온 건지, 내 뒤에 떡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안이 있다.
의미심장한 미소로 나를 보는 녀석.
내가 알 수 없다는 말투로 물음을 던지자 지안은 말했다.
“지유한테서 관심 받는 거,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데 해내셨네요.”
“저게 관심이냐?”
놀라워라. 저게 관심이구나.
“적어도 감정표현을 할 줄 모르는 지유에게선 관심이죠.”
“아무튼 넌 오늘 일에 대해 아는 거 없어?”
이 녀석은 뭔가 알고 있다는 나의 직감이 맞길 바랬다.
그러나 지안은 모른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웃기지마. 네 눈동자가 넌 뭔가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
“글쎄요, 궁금하시면 지유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던가요.”
“걔가 그랬을 리 없잖아!”
평범한 여학생이 무슨 재주로? 하긴, 평범하지는 않다. 그건 인정한다.
높아진 내 목소리에 지안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다.
난 이 놈의 여유만만한 미소가 얄밉다.
항상 지유의 옆에 붙어있는 것도 열 받는다.
가만…내가 열 받을 이유가 없는데?
“지유에게 관심 가지지 않기로 했잖아요.”
“내가 뭘!”
깜짝이야. 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건, 내가 이 학교에서 제일 싫어하는
누군가와 흡사하군.
그 누군가는 지금쯤 미술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테지만.
“관심 가지지 마세요, 걘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 빈 애가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야?”
“순진한 여학생 하나 꼬셔서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번지 수 잘못 짚으셨다 구요.”
“…”
난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는데. 어이가 없다.
뭔가 부정의 말을 해야 하는데, 머리 속이 바글바글 복잡해져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 녀석한테 이런 소릴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왜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선생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뭐?
갑자기 속이 들킨 것처럼, 놀라버렸다.
“오늘 일, 지유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알아.”
“그럼 전 가볼게요.”
“잠깐만.”
지유와 마찬가지로 먼저 등돌리고 교실로 가려는 지안을 붙잡고
제일 궁금했던 질문을 하는 나다.
“그러는 넌, 지유와 무슨 사이지?”
질문이 이상했어! 학생들끼리 사귈 수도 있는 건데 다 늙은 내가 주책스럽게
왜 학생들 연애사에 끼여드는 거야!
하지만 이미 주워담기엔 녀석의 귀는 제대로 뚫려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안의 대답.
“약혼자요.”
싱긋,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교실로 들어가버리는 지안.
잠시 멍하게 굳어 버린 나의 사고 회로.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내가 질투를 하고 있는 거구나…
“박현중, 너 뭐하냐?”
복도에 멍하니 서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거는
이 인간은 미술 선생 정춘자다.
정선배는 자신을 무시하고 창 밖만 주시하는 내 어깨를 사정없이 출석부로 후려친다.
내 어깨는 이미 무감각해졌다.
“야! 너 내말 무시해?!”
“선배.”
“앙.”
“26살이랑 18살이랑은 범죄인가요?”
“범죄는 아니지만 도둑놈이 아닐까? 왜?”
“아뇨, 그냥요.”
보쌈이라도 해가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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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 풀빵은...
꼬릿말 수가 적기에
오기가 싫어집니다;
[무언의 요청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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