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일애

글/그림 :

에델바이스 [10]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cafe.daum.net/love1hart1)

#10



"지안."
"왜?"

"...포도주가 나왔다."
"뭐?"

"입에서 포도주가 나왔다."
"무슨 소리야?"




아직도 얼굴이 병신처럼 하얗다. 난 이런 게 싫다.
어딘가 아파보이는 이 얼굴이 싫다.


소풍이라.

처음 들어보는 picnic 이란 단어에 경험 삼아 와봤던 놀이공원은
생각 만큼 즐거운 곳은 아니었다.


하긴 내게서 즐겁다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오늘따라 안색이 안 좋다. 어디 아파?”
“안 아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저 무표정하게 안의 얼굴을 쳐다봐줄 뿐이었다.


사실은 아픈 게 뭔지 잊어버렸다.

오늘은 그 망할 박현중이 거짓말만 안 했어도 입에서 포도주가 나오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랬을 거다.

그런데 나 이상하다.



박현중만 보면
심장이 아프다.




“오늘 선생님하고 둘이서 롤러코스터 탔다며?”
“…”




도장으로 들어가던 중, 아까부터 뭔가를 말하려던 녀석이 드디어 질문을 한다.


아아, 그랬지. 박현중이 거짓말 해서 탄 이상한 기구.
그게 롤러코스터 였나?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바뀌는 순간이 멋지다니까?’



사실은 살짝 감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셨던 것 같다.
박현중한테는 좋은 냄새가 난다.


우리 오빠 같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난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다.



* * *




오늘은 일요일.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요일.


오늘은 그 시건방진 녀석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날.


마냥 즐겁다. 커피 스푼을 휘젓고 있는 손이 즐겁기만 하다.




“개그 프로가…몇 번이더라?”




이렇게 이른 아침에 볼 만한 프로그램은 없다.
리모컨을 누르는 손에서 실증이 나기 시작한다.

역시 솔로는 외롭다. 아 우울해. 이 화창한 일요일에 어디 나갈 곳도 없고.



친구들은 죄다 과천에 있으니 집으로 부를 사람도 없고,
정선배? 됐어, 그 인간은 불러봐야 내가 더 골치 아파.



멍하니,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 ‘정춘자’




하하…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휴대폰 고리를 이용해, 빙빙 돌리며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나다.



휴, 내일 학교 회의 중에 죽도록 발을 밟히는 것 보다는
시끄러운 잔소리 몇 마디를 듣는 게 낫겠다.




“여보세요.”

-야! 뭐해?


“음악감상요.”

-호, 취미가 고상하네? 야, 나와! 나랑 술 마시러 가자.


“제가 왜 선배랑 같이 술을 마십니까.”

-많이 컸네? 박현중.



“어디예요?”




.
.
.



서울 시내 한 복판. 학생이라도 만날까 싶어, 눈에는 자주 쓰는 안경 대신,
까만 선 그라스를 끼고 정춘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영화 보자고 한 인간이 왜 늦게 오는 거야?!



아침까진 해만 쨍쨍하더니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날 우울하게 만드는 구나.




“야, 많이 늦었지?”




퍽, 하고 뒤에서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제 하도 맞아서 그 손길을 기억해버린 나다. 이제 오셨군요.


정확히 20분 지각이십니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까만 정장을 입을 정선배가 씨익, 웃고 있는 게 보인다.
난 한심하다는 눈으로 정선배를 내려다 봤다.




“아, 새꺄 눈 안 깔어?”
“학교 아니라고 막 나가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그 미친 교장선생 눈치 본다고 얼마나 참은 줄 아냐? 담배 내놔 봐.”
“여기요.”




손에 들려진 담배를 뺏다시피 채어가는 정선배.

수준급 외모, 스포츠 만능, 검도 유도 태권도 합기도, 통 틀어 사범급이 되는 내가
괜히 이 여자를 무서워 하는 게 아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담배를 한모금 빨더니, 후하고 연기를 내뿜는다.




“담배 꺼요, 애들 보면 어쩌려구요.”
“지들도 다 하고 다니는 짓인데, 교사가 좀 하면 어때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인데요? 영화는 제쳐두고 말이나 해봅시다.”
“아는 척 하지마, 재수없어.”




흥, 심난한건 자기면서 어디서 큰 소리요?



항상 가는 호프집으로 걸어가는 나와 정선배.
구석에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아 있는데




“아씨, 선보라잖아!”
“예, 보세요.”


“싫어!”
“왜요.”


“엉엉…난 영원한 독신주의야.”
“늙으면 누가 데리고 산답니까? 젊을 때 가세요.”


“야, 이 나쁜 놈아! 지금 위로하는 거니?!”
“아뇨, 설교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왜 비싼 밥 먹고 선배 위로나 합니까?”





퍽, 옆에 놓인 장식용 플라스틱 꽃병으로 나를 후려치는 선배다.
아악, 진짜 나 여기 있기 싫다!




“선배.”
“왜애애.”




한시간 째다. 말도 안 되는 주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
후…
미리 말해두지만 난 술이 센 편이다. 뭐 내가 남자라곤 하나, 옆에 술에 취한
여자가 헤롱헤롱 거리고 있어도 별로 건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 집에 가고 싶어요.”
“흥, 연약한 나를 버리고 간단 말이지?!”




연약이 다 얼어 죽었나.
아무튼 늦게서야 선배를 차에 싣고 집, 대문 앞에 던져놓은 후 오피스텔로
돌아온 나.


어렴풋하게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건 틀림없이 피였는데.
그 기집애가 포도주라고 주장했지만, 내 눈은 그걸 피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어디 아픈 건가?
생긴 것도 비리비리한 게 어디서 깡은 그렇게 얻어가지구.




“지유라…”




상관하긴 싫어도 어쨌든 그 기집앤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신경 써줘야 하는 건가?

하긴 신경쓰지 말라고 그래도
눈이 계속 간다.

이런 이런, 박현중 니가 뭐가 모자라서 지금 어린애 상대로!






그렇게 어린애는 아니었다 뭐.


어제 엉겁결에 잡은 지유의 손은 차가웠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누구의 말처럼 낯익은 느낌이라는 거.

정말 어릴 때 잃어버린 동생인가?


우리 엄마 나 몰래 동생 낳으셨나?
언제 한번 과천에 내려가서 여쭈어 봐야겠군.



어쨌든 오늘도 똑 같은 일요일이 지나가고, 내일의 해가 뜬다.
그리고 전혀 귀엽지 않은 똑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 한다.


차라리 초등학교 교사가 될걸 그랬다.




“어이~ 박 선생! 오랜만이에요.”
“욘석아, 님자 붙여라!”


“우리 사이에 왜 이래요?”




아악, 시건방진 것들!
참아야 하느니라. 나도 한때 학생이었으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아이들을 이해해야만 해.


아니!
난 학생때 저렇게 시건방지지는 않았어!!


한명을 잡아서 혼내야 되는데.
이미 녀석들은 저만큼이나 멀어져 간 뒤다.




“박현중, 혼자 서서 뭐하나.”

“…”




이 낯익은 말투. 낯익은 목소리. 스윽 옆을 돌아보자마자 보이는 핏기 없는
얼굴의 지유, 그리고 그 옆에 비딱하게 서 있는 지안.


오냐, 너 잘 걸렸다!
난 그녀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선생이 만만하게 보여?! 왜 말끝마다 반말이야? 내가 네 친구냐?!”

“…”




아아, 이게 아닌데.
난 본보기로 이 녀석을 혼낼 생각은 안 했는데.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라서 지유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지유.

차라리 보통 여자 애들처럼 울기라도 하던가. 그럼 맘 먹고 사과라도 하지.
표정변화가 없으니까 알 수가 없잖아.




“...선생님?”




몇 분 동안 말없이 서 있는 나와 지유를 번갈아 보던, 지안 녀석이 슬며시 나를 부른다.




“수업 종 치겠어요, 저희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이게 아닌데.

싱긋 웃으며 지유의 팔을 잡아 이끄는 지안 녀석이 묘하게 얄밉다.
그리고 날 보는 무표정한 얼굴의 지유도.

지안의 손에 이끌려 뚜벅뚜벅 걸어가던 지유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유의 목소리가 들려와 내 귓가에 박혀버렸다.




“죄송했습니다.”




…그게 아냐.
난 사실 너 때문에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가 말이 나온 건데.

하지만 내가 변명을 해야 할 이유따윈 없다.


난 어쩌다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을 훈계한 것이고,
그녀는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받은 거다.


그런 거다. 잘못된 이유는 없다.



그런데 자꾸 큰 실수를 한 것만 같다. 끝에 들린 지유의 목소리가 자꾸 머리 속을
맴돈다.




‘죄송했습니다’




* * *



“유야?”
“…어른은 똑 같은 거였나.”


“…아마도.”
“그래.”




지안은 느꼈다. 담임과 지유의 묘한 공감대를.
복도에서부터 느껴지는 지유의 냉기 가득한 표정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그로부터 지유를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오른쪽 손에 잡고 있는 지유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살짝 구겨진 인상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유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안은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 남자 많아서 좋겠다. 지유?”




지안과 지유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비꼬는 말소리가 교실 뒤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동시에 싸늘하게 굳어진 지안의 눈동자가 그 곳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소풍날부터 지유에게 이를 갈고 있던 김보희가 있었다.

지안은 학교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다고 알려진 그녀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지유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유야, 쟤 알아?”
“못 생긴 애.”




의도적이었을까. 유의 대답이 유난히 크게 보희의 귀에 들렸다. 바로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보희는 저벅저벅 거친 걸음으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너 말 다했어? 학교 다니기 싫은가 보구나, 너?”
“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대충은 지유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접수가 된 지안이다.

유의 손을 잡고 있는 오른손엔 힘이 들어간다.




“유야.”
“…가만히 있어.”




나서지 말라는 그녀의 짧은 대답에, 힘이 들어간 손은 다시 풀린다.




“웃긴다? 너, 나 아주 한대 치겠구나? 남자 많아서 부럽다, 진짜.”
“능력도 안 되는 건가.”

“뭐…뭐라구?”
“비켜라, 길 막지 말고.”


“뭐 이딴 년이 다 있어?!”




보희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번쩍 쳐든 그녀의 손바닥이 허공위로 떠올랐다.
놀란 눈을 한 지안이 보희의 손을 막기도 전에

화르륵, 하고 작은 불꽃이 보희의 손목에 피어났다.




“꺄악!”




놀란 보희의 비명소리와 함께 교실에 있던 모든 이들은 놀란 눈으로 그 불꽃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불꽃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지안은 재빨리 지유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불이야! 불…!!”




소스라치게 놀란 보희가 바닥에 손목을 문지르고,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허둥지둥 물을 퍼오는 아이들.
소란스러운 교실 안 상황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자리에 앉는 지유다.



멍하게 불길을 쳐다보던 지안은 눈으로 지유에게 위험을 표시했다.




‘무슨 짓이야?!’




지유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림으로써
그의 모든 시선을 거부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최대 초능력인 화기(火氣)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는 것을.



자신을 제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초능력 조절에도 능했던 지유. 그런 그녀가 만든 이 상황은,
자신의 초능력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유가 화가 나 있음을 의미했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반 아이들에게 들킬까 싶어, 지안은 고 난이도의 텔레파시를 지유에게 보냈다.
하지만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녀에게 답은 오지 않았다.




‘혹시 담임선생 때문이야?’




순간 지유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하고 움직이는 것을,
예리한 그의 눈동자가 놓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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