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09]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9
"거짓말 잘한다, 박현중."
"야야...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싫다."
“너 말투 좀 고쳐! 나 이래도 선생이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봐, 이봐. 선생한테 존댓말을 사용하는 건, 고정관념이 아니라니까?”
“누가 정했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러니까 고정관념이라는 거다.”
윽, 천하의 박현중의 말빨이 전혀 안 먹히다니.
지금 지유와 난 롤러 코스터에서 내려, 한적한 벚꽃 길을 걷는 중이다.
산들산들 가볍게 불어 오는 바람에 지유의 가지런히 묶은 긴 머리가 흔들린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자 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유를 데리고 이미 한바탕 한 뒤다.
“아까…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뭐? 눈 감은 거?”
“아니, 그거 말고.”
“아…그래.”
지유가 말하는 아까 본 것이라면, 역시 화장실로 직행했을 때 말인가.
초보자라면 늘 그렇듯, 고 난이도의 롤러코스터를 눈 감고 타면 바로
구역질이 나기 마련이다.
지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롤러 코스터가 멈춰 서자마자, 그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더니
화장실로 뛰어가는 지유.
쫓아서 여자화장실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며 화장실 밖에 있던 내 귀에 들려오는
지유의 목소리가 있다.
“박현중, 거기 있나?”
“그래, 왜? 많이 아파? 약 사다 줄까?”
“…아니. 그냥 먼저 가라.”
“왜?!”
“그냥 가.”
“너 많이 아픈가 본데, 등 두들겨 주리?”
“가라니까.”
화장실 밖에 서 있던 날 향해서 무언가에 쫓기듯 가라고 말하는 지유.
건방지긴 하지만, 저것도 학생이라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여자화장실로 휙 들어가,
지유가 들어가있는 칸의 문을 재빨리 닫아 버렸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다.”
“알아, 임마.”
“박현중 여자였나?”
“아니니까, 이러고 있잖냐.”
“…”
“야, 좀 괜찮아? 으악.”
내 눈이 무심결에 변기로 향하고, 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가라고 그랬잖아.”
“…너 어디 아파?”
“아니.”
“근데 이게 뭐야?”
변기 안에 고여 있는 건, 보통 사람들의 토사 물이 아니었다.
물 위로 좌악, 퍼져 있는 붉은 액체. 그건 다름 아닌 혈액이었다.
“…너 포도주 같은 거 먹었어?”
“그런 가 보다.”
“지금 피 토한 거 맞지!”
“…아니.”
“그럼 뭐야! 네 눈엔 이게 포도주야?!”
“…포도주다.”
척 보기에도 검붉은 것이 분명히 피가 맞는데, 지유 녀석은 기어이 포도주란다.
바로 병원으로 끌고 가려는 날 막는 지유.
“병원 가자.”
“포도주라고 했다.”
“미쳤어? 애가 왜 자기 몸 상태도 몰라?”
“…아픈 거 아니다.”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유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녀석의 차가운 손을 꽉 잡는 나.
“아프면, 꼭 말하기다?”
“…”
“알았어?”
“어.”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유.
* * *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입이 마냥 신기한 듯, 손을 앞으로 내미는 지유다.
아직까지 백지장처럼 창백한 유의 얼굴에 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걱정하지마.”
“선생이 자기 학생 걱정도 못해?”
“나 혼자 논다, 선생도 아까 걔랑 놀아라.”
“농담해? 내가 걔랑 왜 노냐.”
“예쁘다며.”
“야, 넌 선의의 거짓말도 몰라?”
“모른다.”
“걔가 예쁘긴 뭐가 예쁘냐? 니가 훨씬 더…아니!”
내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합 하고, 손으로 입을 막는 나다.
순간,
멍한 눈으로 나를 곧게 바라보던 지유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저번에도 한번 봐지만, 이 아인 역시 웃는 게 어울린다.
“내가 그렇게 예쁜가?”
“공주병이야?!”
“선생이 예쁘다고 했다.”
“야야…그건, 말이 잘못 나온 거고!”
“벚꽃하고 똑 같은 건가, 그건.”
“뭐?”
“벚꽃은 예쁘잖아.”
“어.”
빙긋, 웃던 지유의 손에 바람에 실려 온, 벚꽃 하나가 내려 앉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지금 내 눈에
꼭 그녀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희미하게 벚꽃에 겹쳐 보인다.
“…지유.”
“…”
“벚꽃보다.”
“?”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지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난 최면에 걸린 듯 녀석에게 말했다.
“네가 더 예쁘다.”
어라.
내가 잘못한 걸까. 싱긋 웃고 있던 유의 미소가 사라져가는 가 싶더니
어느새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다.
“지안 찾으러 간다.”
“어, 그래.”
“박현중.”
“왜?”
쏴아_ 하고 바람이 나무 사이를 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소녀의 어조 없는 목소리가 날 들뜨게 만들었다.
“박현중도 잘생겼다.”
하아.
너 그거 알아? 나 너한테서 잘생겼다는 소리 두번이나 들었어.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닌데 가슴이 뛴다는 거.
“…간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유의 뒷모습.
가만, 근데 기분 나쁘게 박현중이 뭐야?
부를려면 이름만 부를 것이지.
난 어느새 지유란 아이에게 관심아닌 관심이 늘어나 버렸나 보다.
“야, 임마! 너 혼자 어딜 갔었어?!”
점심시간이라고 돗자리 펴고, 큰소리로 나를 부르는 정선배.
허허. 도시락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저 어마어마한 양의 도시락은 뭐야.
대체 몇 인분을 싸온 거야?
“4인분은 되어 보이네요.”
“당연하지! 너 2인분, 나 2인분!”
“말은 바로 합시다, 저 1인분, 선배 3인분이지.”
“하하,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아쉽구나.”
“아쉽긴요.”
“죽어줘야 겠어.”
농담이길 바라며, 나무 젓가락을 똑, 하고 뜯는 나.
이런. 잘못 쪼갰구나. 눈에 들어온, 짝이 다른 나무젓가락.
내 손에 들려있는 나무 젓가락을 보며 혼자서 낄낄대는 정선배다.
“우하하, 너 나무 젓가락 잘못 쪼개면 재수없다는데!”
“선배 젓가락도 삐꾸 났어요.”
“뭐? 아니야, 임마!”
“맞거든요.”
눈이 있으면 제대로 보기나 하세요. 어쨌든 맛을 장담할 수 없는 김밥 하나를
입에 물고서 우적 우적, 씹었다.
날씨도 좋고, 따뜻하고 벚꽃도 멋진데
심란한 이 기분은 뭘까
“심각한 표정 짓지마, 김밥 맛 없는 거 알아.”
“예.”
“죽을래?”
“아뇨.”
“어! 저기 디카프리오 지나가네!”
“후…”
선배가 디카프리오 라고 부르는 학생은 우리 학교에 단 하나뿐이다.
아 제길, 하필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을 만나다니.
고개를 들자마자, 지유의 손을 잡고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내 눈에는 오로지 두 녀석이 마주 잡고 있는 손만 보인다.
뭐 지안 녀석이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쟨 왜 뿌리치지도 않아?!
이유없이 화가 난 내가 이상하다.
“질투로 온 몸이 타오르는 구만.”
옆에서 빈정거리는 정선배. 흘깃, 선배를 노려보는 나.
질투가 아닌데.
분명히 아닌데,
내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박수를 치며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뭐냐, 반격 안해?”
“…힘이 없어서요.”
“뭔 헛소리래?”
아아, 나의 바른 교사생활이 머지않아 막을 내리겠구나.
한숨을 푹 내쉬는 내 눈에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이 보인다.
은근히 속쓰리네, 이거.
그때 드르르, 하고 목에 걸려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네, 여보세요?”
-나다.
낯익은 목소리가 휴대폰 저편에서 들린다.
“어? 엄마!”
-그래, 오늘 학교 소풍이래며?
“어, 학생들 덕에 나도 쉴 겸 노는 날이지. 왜? 우리 엄마 외로워?”
-외롭긴, 녀석아. 그냥 생각나서 걸었다.
“호, 외동아들 생각에 밤잠 못 이루시는 거 아니고?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래 혼자 사는데 밥은 잘 먹고 있나 해서.
“나 원래 잘 먹잖아.”
-쯧, 음식도 잘 가려먹으면서 그래,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어, 몸 조심해요!”
삐빅_ 하는 소리와 함께 끊긴 휴대폰.
하하, 혼자 서울 와서 사는 내가 어지간히 걱정이 되신 모양이다.
매주 한번은 꼭 걱정에 못 이겨 전화하신다.
후, 언제 한번 과천에 내려가봐야 하는데.
“누구야? 어머님이셔?”
“네.”
“아들 걱정은 여전하시네, 아버님은 잘 계신대?”
“잘 계시겠죠 뭐.”
과천에서 회사 이어받으라는 걸, 바득바득 우기고 서울로 왔을 때부터 내내, 내게
화가 나신 아버지.
그래도 외동아들인데, 고집한번 들어주시지.
“아직도 너 선생일 한다고 화나계시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좋은 대학 나와서 회사 이어받으면 얼마나 좋아.”
“전 도저히 책상 앞에만 앉아 있기 짜증나서요.”
“교탁은 괜찮냐?”
교탁은…절 똑바로 서있을 수 있게 만들어 주잖아요.
늦은 봄의 벚꽃이 머리 위로 눈꽃처럼 떨어진다. 그리고
오늘은 소풍 날이다.
잊을 수 없는 소풍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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