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08]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8
“휴…”
“어머, 웬 한숨? 박선생?”
“날씨가 좋아서요.”
“그래? 난 바이킹 타러 간다!”
“예에.”
가서 제발 살아 돌아 오지 마세요.
바이킹을 타러 간답시고, 벌써 작게 보일 만큼 달려가는 노란 츄리닝 차림의
정춘자 선생님.
아침부터, 저 인간의 단련된 무쇠 주먹에 맞았더니
온 몸이 콕콕 쑤셔온다.
“아고고.”
“박현중, 까불다가 맞았나?”
“까불긴 누가 까불어!!”
“아니면 말고.”
아아,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벤치에 앉아있는 내 옆에는 차에서부터
따라온 지유가 있다.
올해 운세가 여자한테 당할 운세라더니, 쌍으로 나를 말려 죽이는 구나.
지유의 옆에 철썩 같이 붙어있는 또 한명.
지안. 쟨 왜 훤칠하게 생겨서 여자는 얘 밖에 모르냐.
“유야, 우리 관람차 타러 갈래?”
“그게 뭔데?”
“저기 보이는 거 있지? 돌아가는 거.”
“싫다.”
단칼에 거절하는 지유.
푸하하. 근데 정말 웃기잖아.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몰래 입을 틀어 막으며 웃는데 지유의 눈길이 느껴진다.
“야, 니들도 가서 놀아!”
“저런 거 타면 재밌나?”
“그래! 소풍 왜 왔냐!”
“…”
빤히 관람차를 주시하는 지유.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서 지안의 앞에 다가간다.
“어? 왜?”
“타러 가자.”
“…응.”
별난 녀석일세. 그 말 한마디에 얼굴이 발개져서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유와 그 뒤를 빠르게 따라가는 지안.
멍하니 그 둘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가슴에서 뭔가 지잉, 하게 아파온다.
흠, 뭘까. 이 아픔은.
아무래도 정선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서 몸을 피해야 하나?
두리번 두리번, 사방을 둘러봐도 갈 곳이 없는 걸 발견한 난,
그대로 지안과 지유가 간, 관람차로 향했다.
오오, 녀석들이 저기 있구나.
“아, 여기 자유이용권요.”
“앞에 학생들은 먼저 출발했는데, 다른 차를 타시겠습니까?”
제길. 한발 늦었잖아?
아무튼 혼자 타는 관람차란, 서글프기 그지없구나.
바로 맞은편으로 지나가는 관람차 안에 있는 지유와 지안이 보인다.
부럽기 그지 없군.
신께서는 대체 언제까지 이 완벽남을 솔로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저기 저! 새파랗게 어린 것들도 연애를 하는데요!
“쯧, 부럽냐?”
히익.
옆에서 들려오는 웬 낯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난,
관람차 안에서 한번 더 지옥을 맛봐야 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다가오는 정선배.
다 괜찮은데, 거기 쥐고 있는 주먹만은 펴주길 바래요.
“아하하…”
“어딜 겁도 없이 토끼냐, 토끼길!”
“내가 언제 도망 갔다고 그래요?!”
“그럼 뭐냐, 그건 그렇고 너 쟤 좋아해?”
“예에?”
우물 우물, 입안에 뭔가를 잔뜩 물고서 손가락으로 맞은 편 관람차를
가리키는 정선배. 내 시선이 주욱,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
지유의 얼굴에 다다른다.
왕방울 만큼 커져 버린 내 눈동자.
“하아?”
“너 진짜 쟤 볼 때마다, 눈이 반짝거려, 그거 알아?”
“설마요.”
무슨 악담을 하는 거야, 이 인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나와 의미 모를 미소를 띄고 있는 정선배다.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당연히 아니죠.”
“솔직하긴.”
“제 말은 절대 아니라구요.”
“내 예상은 빗나간 적이 없는데? 야, 너 진짜 솔직하게 불어봐.”
“뭘 불라는 겁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 탓에 깜짝 놀란 정선배의 인상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눈을 꼭 감고, 손을 엑스자로 만드는 나.
“혼자 뭐하냐, 너.”
“때릴 거잖아요.”
“잘 아는 놈이 왜 이리 반항일까?”
“아, 근데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래?”
“예.”
“그럼 말고, 애가 왜 흥분하고 그러니?”
몰라요, 나도 그 녀석 일은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래요.
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다.
선생이라는 인간이 무슨 허튼 생각이람.
설레설레 고개를 저어보는데, 아까부터 계속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주시하고
있는 정춘자씨. 그 눈을 거두어 주십시오.
“근데…쟤 은근히, 너랑 닮았어.”
“또 무슨 헛소리예요.”
“아냐, 진짜 눈매가 닮았다니까?”
“안 닮았어요.”
“혹시 숨겨둔 여동생 아니야?!”
“전 이때까지 살면서 무녀독자 외동아들이라구요.”
“어이구, 잘나셨어.”
그러고 보니, 조금 낯익은 것 같기도 했는데.
어느 샌가, 관람차에서 내려서, 사라진 두 녀석. 뒤 따라 가자는
정선배를 뿌리치고, 슬금슬금 롤러코스터 쪽으로 이동하는 나다.
아씨, 괜히 울적해졌다.
“어? 선생님!”
“그래, 안녕.”
“롤러코스터 타시게요? 저도 같이 타요!”
“난 혼자 타는 걸 즐겨.”
내가 혼자 대기줄에 서있자, 우리 반 날라리 여학생 하나가 쪼르르 달려 온다.
요 녀석도 옷차림이 요란하구나, 차라리 벗어라, 벗어.
차라리 지유가 낫지…가 아니라!
“에이~ 선생님 같이 타요! 나만한 미소녀가 같이 타주는데?”
“미소녀 다 얼어 죽었나…”
미소녀라면 지유 정도는 돼야지.
아니! 나, 왜 이래?
“선생님, 저 정도면 예쁜 거 아니에요?”
“그래, 그래.”
“아뇨, 진짜요!”
“그래, 예쁘다니까?”
예쁜 사람 다 얼어 죽었냐, 네가 예쁘게?
입이 뾰루퉁하게 나와 있는 예나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는 나.
선생이란 직업은 이럴 때 참 곤란하다.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너 진짜 예뻐. 자, 롤러코스터나 타자.”
“정말요?”
“그래.”
“정말이죠?”
그만 좀 물어라. 총각 선생이라고 날 만만하게 보는 건가?
그 때 뒤에서 들려 오는 음산하리 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하나 있다.
“박현중, 거짓말 뺨 때린다.”
엥? 뭐가 뺨을 때려?
누군가 했더니,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지유가 아닌가.
“어? 선생님, 이름 함부로 부르네, 너?”
“…근데.”
갑자기 내 옆에 있는 이 아이가 누군지 생각나버렸다.
지유.
넌 왜 하필 전교에서 제일 문란하다는 김보희를 건드린 거냐. 아아, 귀찮아.
보희의 깔끔하게 다듬은 눈썹이 지유를 향해 새초롬하게 올라가고
유는 평소와 다름없는 거만한 눈으로 보희를 쳐다본다.
“싸우지 말아라.”
“안 싸운다.”
“그럼 너 가던 길 가던지.”
아주 싸가지 없는 말투로 지유를 흘겨 보는 보희.
감정 없는 유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거슬린 건지, 보희는 진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잘하는 박현중, 실망이다.”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얘가 뭐가 예쁜가? 눈이 단단히 삔 거다.”
“야!”
아하하, 지유 녀석의 저 말투란, 언제 들어도 날 웃게 만드는 구나.
발끈해서 유에게 소리치는 김보희.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나다.
“듣자 듣자 하니까, 너 미쳤어?!”
“제 정신이다.”
“하아? 전학생이라서 봐줄까 했더니, 진짜!”
“안 봐줘도 된다.”
이런 이런. 더 있다간 큰일 나겠는데?
난 이 상황을 말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찌했던 싸움의 계기는 내가 아닌가.
“얘들아, 그만하고…”
“잠깐만 있어봐요! 이 기집애가 진짜 막 기어 오르네?”
“후, 재미없다.”
“야, 너 그 상판을 아주 뭉개버리는 수가 있어.”
“푸우.”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보희를 더 열 받게 만드는 지유다.
아악, 요 녀석들아! 나도 교사란 말이야. 내 말을 좀 들어!
너희 둘 다, 교사 우롱 죄로 반성문을 쓰게 만들 테다.
그나저나 정말 잘못 건드렸다.
학교의 여짱으로 소문난 보희의 성격에 당장이라도 손이 지유의 하얀 뺨을
내려칠 것만 같다.
마침, 롤러코스터가 들어와 대기줄이 앞으로 밀리기 시작하고,
난 그대로 지유의 손목을 잡고 롤러코스터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이고, 고막이야.
보희의 찢어질 것만 같은 비명소리가 저 뒤에서 들려온다.
후우, 간만에 뛰었더니 심장이 다 벌렁거리네.
숨을 길게 내쉬고 난 뒤에야, 난 내 손에 꼭 잡혀있는 지유의 손을 발견했다.
“악! 미안!”
“…나, 이거 별로 타고 싶지 않았어.”
“아, 그랬니? 어쨌든 나한테 감사해, 녀석아.”
“왜?”
“아까, 쟤가 우리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애란 말야.”
“내가 더 무서울 텐데.”
농담도 정도껏 해라. 잡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으로 누굴 상대하겠다는 거야?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 바가 내려오더니 롤러코스터의 속도가 차츰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거 설마 360도 회전하는 건가…?”
“그렇지. 하늘과 땅이 바뀌는 순간이 멋지다니까?”
“…정말?”
“그래!”
“나, 눈감는다.”
“야, 너 무서워 하냐?!”
“시끄러워.”
콰아아아앙_ 하는 소리와 함께 재빠르게 달리는 롤러코스터의 최고 절정.
360도 회전하는 코스가 나타나자 마자, 눈을 꼭 감아 버리는 지유.
의외로 귀엽군.
아악! 이게 아니야!
“우아아악.”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360도 넓은 회전을 하며 도는 롤러코스터.
눈 깜짝할 새,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된다.
그래서 난 이 뒤바뀐 기분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좋아한다.
살며시 옆을 보니,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유가 보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다.
“아직 안 지나갔나?”
“어.”
“박현중,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아직 안 지나갔다니까? 이거 꽤 오래 걸려.”
거짓말이지. 당연히.
롤러코스터가 얼마나 빠른데, 그 코스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하지만 왜 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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