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29] [완결]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http://cafe.daum.net/love1hart1)
#29
그렇게 헬기 안에서 미친듯이 악을 쓰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하얀 천장과 진한 약품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내 옆에는 누워있는 날 보며 힘 없이 웃어보이는 지유가 있다.
다행이다…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래, 기억해 냈다.
헬기 안에서 그렇게 고함치며 지안을 다그치던 난, 결국 제너멀 오피스텔의 처참한 현장 앞에서 지유를 기다렸었다. 그리고 검은 연기와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불사신처럼 유유히 내 앞으로 걸어 나왔던 지유.
그 순간 난 한심하게도 긴장이 풀려 쓰러졌고, 그 때문에 병원으로 실려온 것 같다.
창백한 지유의 얼굴.
“많이…아파?”
조심스럽게 난 그녀에게 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젓는 지유다. 손으로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지유.
“어떻게 넌…그 불덩어리 속에서 살아 나온 거냐. 불사신 같은 녀석.”
“박현중이 나를 불러서.”
“들리긴 들렸나 보네, 나 목 터지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들린다.”
지유는 내 손을 뺨에 가져 다 대었다. 식은 땀이 맺혀있는 지유의 이마. 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을 보고서 그녀는 괜찮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인다. 어쩐지 그 미소가 측은해 보였다.
“괜찮은 거지? 그래, 괜찮은 거야.”
“…”
아무 대답 없이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지유. 그때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병실 문 사이로 하얀 가운을 입은 윤선배가 들어 온다.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인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차는 윤선배.
“어디서 맞고 온 거냐, 명색이 S대 격투동아리 주제에.”
“아무리 저라도 떡대들을 상대하긴 벅차더라구요.”
“그나저나 예쁜아, 넌 이제 안 아프니?”
금새 화재를 바꾸어 옆에 있는 지유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윤선배. 이 인간이 어디서 꽃바람을 풍기는 거냐!
하지만 다행히도 지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미소를 뭉개어 버렸다.
훗, 그 미소 공격도 이제 한 물 가셨나 보군요?
“흠, 아무튼 박현중은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 너도 진료실로 갈까? 내가 보기엔
너도 정상은 아니거든.”
무안한 듯 지유를 보며, 헛기침을 하는 윤선배. 진료실로 가자는 선배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윤선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말한다.
“네가 설득 좀 해봐. 네가 기절해서 실려온 순간부터 계속 옆에만 있었다니까? 보기에도 아파 보이지 않냐? 넌 타박상 주제에 뭘 잘했다고 기절은 해서.”
“…지유야.”
“그냥 옆에 있을래.”
“말 들어. 너 아프잖아.”
“안 아파.”
문득 제너멀 오피스텔에서 만난 중년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그 아이의 뇌는 이미 반쯤 죽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내 옆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는데?
안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날 눈치챈 건지. 지유는 잠시 대기실에 있는 지안에게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으로 향하던 지유는 다리를 휘청이며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지유야!”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있는 지유를 향해 다가가는 나. 창백한 지유의 얼굴. 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이대로 덜컥 죽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수많은 상상들이 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닐 무렵, 윤선배는 그런 날 알아차리고서 머리를 콩 쥐어 박으며 말했다.
“잠시 쓰러진 거야. 미리 생각하지마.”
지유를 들쳐 업고서 진료실을 향해 걷는 윤선배. 뒤따라 걷던 난, 선배에게 내가 업고 갈 것임을 전달했고, 그러라는 듯 그는 내 등에 지유를 업혀 주었다.
얘가 내 동생…
그래서 일까. 등에 업고 있어도 익숙한 느낌이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닐 거라는 믿음이 서려 있었다.
빠른 속도로 진료실을 향해 걷는 나. 조용한 병원 복도에는 윤선배와 내 발걸음 소리만 또박또박 하게 들린다.
“아닐 거야…우리 남매 아니야, 지유야.”
“…”
언제 깬 걸까. 등에 업힌 채 내 혼잣말을 듣고 있던 지유는 그런 나를 다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꽉 감싸 안는다.
“언제 깼어? 치사하게 잠든 척 하긴.”
“…다리에 힘이 풀렸어.”
“진짜 골고루 하는 구나? 이제 내려와. 무거워 죽겠다.”
“싫어.”
거짓말이다. 솜털…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볍긴 하다. 여자애가 말라 빠져서는.
등에 업혀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지유의 표정을 말이다. 틀림없이 또 이런 날 비웃기라도 하듯 싱긋 웃고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빠르게 움직이던 내 발걸음은 천천히 느려졌다. 저 만큼 날 앞서 걷고 있는 윤선배. 난 선배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네 심장은 나한테만 뛰는 거지?”
“응.”
“그렇구나.”
“…나, 잠 와.”
“자면 안돼, 이제 진료실 다 왔어. 가서 주사 맞고 자.”
“박현중…울어?”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한 건지,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 등 뒤에 업혀있는 지유의 손이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내게 물었다.
몰라…나도 내가 왜 우는 지, 몰라.
“모르겠어…내가 지금 왜 울고 있는 건지. 나도…모르겠어.”
“미소만 기억해야 돼.”
“응?”
“눈물 같은 건, 슬프니까 기억하지 마. 박현중은 미소만 기억해.”
그래. 미소만 기억할게, 눈물말고 미소만 기억할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서툰 움직임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지유의 하얀 손. 그 손의 움직임이 천천히 느려져 간다.
“자면 안돼…알았지? 졸려도 참아.”
“내 심장은 박현중한테만 뛰니까…네 심장이 뛰고 있으면 나도 뛰고 있는 거야.”
“그럼…”
“나 동생으로...기억하지...마.”
난 동생 같은 거 없어. 기억 나지도 않아.
바보 같은 눈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그리고 내 뺨을 잡고 있던 지유의 손은 어느샌가 힘이 풀린 채, 스르륵 하고 내 어깨에 걸려있다.
내가 자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잠들면 어떡해.
다리가 제자리에 멈춘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유가 했던 말들이 자꾸만 머리 속을 맴돈다. 그래서인지 눈물은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 동생으로 기억하지마.’
‘내 심장은 박현중한테만 뛰니까…네 심장이 뛰고 있으면 나도 뛰고 있는 거야’
……
이제 영원한 잠이 들었을 지유에게 난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럼…내 심장은 멈추겠다…지유야.”
내 심장도 너한테만 뛰니까. 이제 내 심장은 멈추겠다.
.
.
.
#From 지안.
두시간 전.
정신을 잃은 담임 선생을 헬기에 태우고, 병원 옥상으로 도착했을 때. 지유는 내게 말했다.
“해독제를 찾았어.”
그녀는 내 눈 앞에 빨간 구슬처럼 생긴 백신을 내밀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의 왼쪽 갈비뼈 아래에 백신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지유는 예리한 흉기를 사용해, 자신의 복부를 찔렀을 것이다.
백신을 꺼내기 위해 넌 고통을 감수했던 거구나.
“이걸 나한테 보이는 이유는, 네가 죽을 거라는 확신이지?”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지유.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 가부터 침묵은 지유에게서 긍정의 대답이라는 걸. 그리고 자유로운 새처럼 이곳을 떠날 그녀였음을.
난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 했다.
행복해야 한다고, 내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그렇게 여러 번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넌 그걸 먹으면.”
“병기화를 막을 수 있어.”
“하지만!”
“…죽어.”
병기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백신. 붉은 구슬은 혈액을 타고 심장에 이르게 되고, 백신은 지유의 심장에 장착되어 있는 초능력 본체를 파괴시킨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심장도 함께 멈추어 버린다. 난 어쩌면 지유가 백신을 찾지 않길 바랬던 것일 지도 모른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었던 지유.
난 지유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다.
“왜…왜 이래야만 하는 걸까.”
“마지막은 인간이고 싶으니까.”
유난히 미소가 많아진 지유는 내게 싱긋 웃어 보였다. 붉은 눈동자로 변해버린 지유. 이미 병기화의 마무리 단계에 와있다는 증거다.
처음 단계는 혈액이 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단계는 기억을 잃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지유는 두 번째 단계를 넘어섰다.
더 이상 병기화를 막을 수 없음을 판단한 지유는 내 앞에서 붉은 백신을 삼켰다.
“내가…너 좋아하는 거 잊지 마.”
“…고마워.”
“네가 행복하길 바랬어. 이렇게 되는 거…원하지 않았어!”
“지안...”
"..."
"난 행복해."
"그런 말 하지마."
"진짜야. 박현중을 만나고 나서 행복했고, 인간으로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해."
알고 있었다는 그녀의 끄덕임. 그리고 다시 담임 선생이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가는 지유. 마지막까지는 그의 옆에 있고 싶다는 지유의 뜻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사의 등에 업혀 밖으로 나오는 지유가 보였다. 날 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다.
죽는 그 순간까지…강한 척 하지마.
한 없이 약한 주제에. 약하기만 하면서 왜 끝까지 강한 척이야.
지유를 등에 업고 복도 저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담임 선생의 발걸음이 멈췄다.
난 알아차렸다.
그녀가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걸. 그리고 빌었다.
부디…다음엔 행복하길.
다음에는 아픈 사랑따위는 하지 않기를.
다음 번에는 내가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너만은 행복하길.
<<From G-an End>>
#에필로그.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깊은 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죽은 후 세 번의 봄이 지나갔다. 그리고 난…아직도 살아가고 있다.
지안은 G그룹을 빠져 나와 일본에서 경호 시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난 여전히 놀기 좋아하는 선생이다.
“선생님! 오늘은 자습 안해요?”
“야, 나 교무회의에서 걸렸어. 니네 맨날 자습 시킨다고.”
“그냥 해요오.”
“하긴 뭘해. 진도 나가야 돼.”
“오늘은 그럼 칠판에 영어 써놓고 다른 얘기하고 놀아요!”
“그럴까?”
머리도 좋구나. 그래. 칠판에 써놓기야 하면, 밖에서 누가 봐도 수업을 하는지, 딴 짓을 하는 지 알게 뭐야.
난 싱긋 웃으며 분필을 집어 들었다. 교과서에 있는 형식적인 단어들을 칠판에 옮겨 적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야, 내가 3과 단어 다 적는 동안에 무슨 얘기할 지 정해. 우물쭈물 하면 그냥 수업 한다?”
“흠…선생님!”
“왜?”
“첫 사랑 얘기 해주세요!”
…
영어 단어를 적고 있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난 뒤로 돌아서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첫사랑이라. 중학교 때 좋아했던 교생 선생도 있고, 대학생 때 처음 사귄 후배도 있는데?”
“그런 연애 말구요! 실연 당했거나, 아무튼 슬픈 사랑 얘기요!”
나한테서 슬펐던 사람이라면, 지금도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눈이 젖어 드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만 기억해야 한다는 게 슬픈 난, 가끔씩 이렇게 기억 속을 더듬어 그녀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꺼내어 놓는다.
“3년 전에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지.”
“오오, 별로 오래 되지는 않았네요?”
“그런데 나한텐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야.”
”어떤 여자였는데요?”
“…말하자면 조금 길 텐데?”
“그래도 해주세요!”
“…착하진 않았어. 시건방지고 도도하고, 머리도 좋아서 내가 옆에 있으면 바보가 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얼굴은 예쁘고 말투는 꼭 남자 같은 말투?”
그랬지. 아직도 분명하게 생각 나.
일정한 어조로 ‘바보선생’ 이라고 내게 말하던 그녀가.
“참 특이한 여자네요.”
“흠…거기다 바보같이 울 줄도 몰라서 참기만 할 줄 아는 녀석이고, 또 비오는 날 갑자기 날 찾아와서 고백을 하질 않나…내가 위험할 땐 달려와서 구해주질 않나. 불사신 같았지.”
“지켜준다는 걸 보면, 힘이 세나봐요?”
“…아니, 약해.”
“그런데 어떻게 지켜줘요?”
“글쎄? 분명한건, 정말 그녀는 날 지켜주고 갔다는 사실이야.”
“오오, 굉장히 멋있어요!”
“또…어울리지도 않게 분위기 잡는 말도 잘하고, 사람 감동 먹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닭살스런 대사를 날리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 에델바이스 꽃을 좋아했던 긴 머리의 소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내가 슬플 때 위로해주기 위해서 내 눈물이 되고 싶다고 했던 사람.
나한테만 심장이 뛴다고 말했던 사람.
내가 처음으로 만나지 못해서 가슴 아팠던 사람.
…
이젠 소중한 추억으로,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미소로만 남은 사람.
지유는...
그런 여자였다.
어느날 문득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오는 사랑.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이야기’ 에델바이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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