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01]
일심일애 (hood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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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
“춥다, 추워. 빨리 장 봐서 들어가야지.”
“…”
아직 이른 봄이라 쌀쌀한 아침.
하얀 운동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할인마트로 향하고 있다. 부스스한 머리에 하얀 얼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삐딱하게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정일고등학교 최고의 프린스, 박현중 그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간단한 장을 보고 나온, 그의 눈에 골목길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긴 머리의 소녀가 보인다.
“거기,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
하얀 입김이 그의 입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특유의 듣기 좋은 바리톤의 음성에 고개를
무릎에 묻고 있던 소녀가 빤히 몸을 일으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봄에 입기엔 추운 하얀 끈 원피스를 입은 맨발의 소녀.
초점 없는 그녀의 커다란 눈이 현중의 눈과 마주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추운데…신발이라도 신으시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소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현중이었다.
아직 새벽이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언듯언듯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소녀의
하얀 얼굴은 청초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조금은 낮은 그녀의 목소리.
“상관 마.”
“…?!”
발끈. 척 보기에도 어려보이는 소녀의 대답에 그는 설레 이면서도 분노하고 있었다.
“몇살이야, 너!”
“18살.”
“학교가 어디야?!….어?”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도 바로 앞에 있었던 그녀가 훵하니 사라진 것이다.
“내…내가 귀신을 봤나?”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현중의 머리 위
높은 공중에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지유가 공중에 떠 있는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어디 갔다 왔어?”
“…꼭 말해야 하나?”
“어.”
“옛날에 내가 살던 곳.”
“…너!”
지유는 생각했다. 눈 앞의 성가신 G그룹의 도련님을 밟아 주고 싶노라고.
당장 마음만 먹으면, 연약하게 생긴 저 도련님을 1초도 안되어 죽여버릴 수 있는 그녀였다.
방금 전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동네로 다녀오는 중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서자 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 창 가에 G그룹 총수의 아들인 지안이 서있었다.
지안.
그는 지유와 같은 열 여덟의 나이로 미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었다.
짧은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지안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약속했잖아. 옛날 일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잊는다고는 하지 않았어.”
13년 전, 그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모든 것을 잊으라고.
그녀에게 인간이길 포기하라고 말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지안의 손이 보인다. 그런 지안을 보며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부에 보고하려면 해.”
“안 해.”
“…”
“널 한국으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내가 태어난 나라야.”
“…예전 일은 잊어.”
긴 머리를 검은 끈으로 묶은 채, 검은 도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지유가
지안에게로 몸을 돌린 채, 그를 응시했다.
“넌 스스로 약속했어.”
“너희도 나와 약속했다. 내가 킬러가 되면, 우리 오빠를 찾아주겠다고.”
얼음보다도 차가운 냉기가 가득한 지유의 목소리.
지안은 누구보다도 지금 그녀가 기분이 심하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 표현을 할 줄 몰라,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지금 지유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13년간, 그녀와 함께 지내온 지안이기에 알 수 있었다.
“…너에게서 ‘오빠’란 존재는 뭐니?”
…
지유는 함께 지낸 세월 속에서 오빠란 존재만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이유를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 *
“얘들아, 어제 나 귀신 봤다?”
“정말요? 예뻐요?”
예쁘긴 했지. 좀 건방진 걸 제외하곤.
오늘도 아이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역시 미남이란.
“근데 그 귀신이…되게”
“되게 뭐요!”
“예쁘더라고.”
“오오, 우리 쌤 단단히 홀리셨네!”
“시끄럽다, 제자들아.”
요것들이 좀 풀어주니까 막 나가는 구나. 아고, 어제 밤부터 잠을 설쳤더니,
피부가 거칠어졌어.
그런데 그 귀신, 낯익은 느낌이었는데.
“똑똑.”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목소리 사이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했더니, 환경부장 선생님이군.
노처녀 환경부장은 여전히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힌 채, 윙크를 해댄다.
이보세요, 전 댁한테 요만큼도! 아주 요만큼도 관심이 없다구요!
“후, 안녕하세요?”
“오늘도 멋지시네요, 박선생님,”
당연하죠, 누구랑 달리 전 창창한 26세의 젊은이니까요.
예의상의 미소로 씨익, 웃어보이며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고 묻는 나.
“아, 전학생이 두 명이나 있어서요.”
“두 명이나요? 안돼요! 한 놈은 다른 반으로 보내요!”
“호호, 농담두.”
농담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건방진 녀석들이 둘이나 더 들어온다니요!
속마음은 울부짖고 있건만, 눈 앞의 눈치 없는 아줌마는 활짝 웃으며 멋대로 지껄이고 있다.
“지안, 지유. 담임선생님께 인사 드려라.”
지안, 지유? 이름도 특이하긴.
어라, 혼혈이네?
환경선생의 소개와 함께 먼저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남학생.
죽이는 금발머리에 검은 눈동자.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휘어잡는 녀석의 차가운 눈.
호오, 제법 잘생겼는데. 또 여자애들 난리나겠구만.
“꺄아! 꽃미소년이다!”
“야야! 니네 흥분하지마! 얘 놀란다.”
언제나 나의 예상에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 지안이란, 녀석이 교실로 들어오기
무섭게 학교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대는 아이들이다.
아아, 나의 팬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구나.
이마를 집고 벽에 기대 서있는데, 지안은 날더러 이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달라는 듯,
빤히 날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지유도 어서 들어가보렴.”
아, 한명이 더 있었지.
환경선생이 여학생 한명을 교실로 밀어넣는 듯 하더니
이번엔 남자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난, 아직도 이 골치 아픈 상황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중이다.
“오오_ 쟤 되게 예쁘다.”
명색이 남녀공학에 다니는 녀석들이 왜 여학생 처음 보는 것처럼 고함을 치나 하고,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 난 까무러치고야 만다.
“이녀석들아, 여자 처음 보냐…아악!”
어제 새벽에 만난 긴 머리의 미소녀, 아니 처녀 귀신이 내 눈앞에 회색 교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비명에 소녀는 잠시 인상을 구기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선생님, 우리 지유 아세요?”
“어?”
‘우리 지유’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지안이 역시나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고,
난 그 눈빛에 섬뜩함을 느낀 채 멍하니 서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마. 오늘 처음 봤어.”
낮고 일정한 어조로 지안을 향해 말하는 소녀. 그제야 경계하던 시선을 거두고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녀석.
그건 그렇고 거기 너! 나, 오늘 처음 봤냐! 거기다 얘네는 무슨 사이야!
일단, 같이 전학 온 걸 봐서 보통사이는 아닌 것 같다.
“얘는 지유고, 내 이름은 지안. 성이 ‘지’고 이름이 안이야.”
“만나서 반가…워.”
지안이란 녀석은 그럭저럭 평범한 것 같은데,
저 지유란 소녀는 눈동자가 죽어 있다.
“자, 이제 자리를 배정할까? 보자, 어디가 좋을까?”
“…창가로.”
“어라? 지유? 창가에 앉고 싶니?”
“…”
건방진 녀석.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지유.
호, 의사표시도 할 줄 아는 군.
지유가 창가로 가겠다고 말하자 마자, 그 옆으로 가겠다는 지안.
니네 부부냐?
의심쩍은 내 눈을 보고서도 싱긋 미소를 짓는 지안이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의자를 빼 주는 놈의 에스코트에 응하는 지유나,
두 놈다 이상한 학생들이다.
“…”
그냥 지금은 두고 보자.
앞으로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니까.
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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