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헤라클레스에게 죽임당하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게리온을 이야기의 중심에 둔다.
1998년 처음 발표된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괴물에게 어린 시절과 사랑, 상처와 기억을 부여한다.
신화에서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에 등장해 죽음을 맞지만, 작품에서는 영웅의 과업을 이루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주인공으로 바뀐다.
작품 속 게리온은 붉은 몸과 날개를 지닌 소년이다.
그는 다섯 살 무렵부터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성장한 뒤 헤라클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지지 않고, 게리온은 이별 뒤 카메라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담는다.
시간이 흐른 뒤 남미 여행 중 헤라클레스와 그의 새 연인 앙카시를 다시 만나 화산 지대를 함께 여행한다.
신화의 대결은 이렇게 사랑과 상실을 겪는 인물들의 관계로 옮겨간다.
『빨강의 자서전』은 산문처럼 문장이 이어지는 일반 소설이 아니라 시의 행과 리듬을 활용한 운문소설이다.
장면이 바뀌고 시간이 건너뛰며 이미지가 겹친다. 빨강은 게리온의 존재와 강렬한 감정에, 날개는 남들과 다른 모습에 연결된다.
화산은 쌓인 감정과 변화의 이미지로, 사진은 자신과 세계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게리온에게 사진은 세상을 관찰하는 수단인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남기는 방법이다.
카슨은 헤라클레스를 악인으로 바꾸기보다 게리온에게 독자적인 삶과 목소리를 준다.
붉은 몸과 날개를 동성 간 사랑에 그대로 대응시키기보다는 규범 바깥에 놓인 존재의 경험을 드러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영웅과 괴물이라는 신화의 구도는 게리온이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나면서 한 인물의 시선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관계로 확장된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