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는 어떻게 외교 모임에서 대중 문화행사로 넓어졌나

느린호두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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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무도회는 서양 사교춤이나 민속춤을 선보이는 공연이자 사람들이 모이는 회합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꼽은 최초의 공식 대형 무도회는 1905년 11월 6일 경성 청나라 공사관에서 열린 ‘무도연회’다. 대한제국에 들어와 있던 외교관과 선교사, 유학생, 조선의 고관과 귀족들은 외교와 교제를 위해 무도회에 참석했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에서도 무도회가 자주 열렸다.

그레이스 브러스 오디토리움에서 리프트를 선보이는 볼룸 댄서들 자료사진 · Sam Hood · 원본 · Public domain

무도회는 사교뿐 아니라 자선·공연과도 결합했다. 1915년 조선호텔에서 열린 벨기에구제자선음악회에서는 참가자들이 연회복을 입고 이왕직 양악대의 반주에 맞춰 춤췄다. 1917년 다동기생조합 연주회에서는 기생들이 서양무도를 처음 춘 사례가 나타난다. 무도회가 일반 문화행사로 널리 행해진 계기는 블라디보스토크 교포 청년학생들의 고국순회공연이었다. 학생들이 무대에서 직접 춤추고 계몽·자선 취지로 연 음악무도회는 춤에 대한 인식을 바꿨고, 이후 무도회는 크게 유행했다.

경성의 학교와 교회는 강연이나 체육 행사에 무도회, 음악무도대회 등을 곁들였고 기금 마련을 위한 무도회도 열었다. 춤을 배우는 통로도 생겼다. 김동환은 1922년 6월호 『개벽』에 실은 「무도란 여하한 것인가」에서 무도를 무대무도와 사교무도로 나누고, 사교춤은 5~6개월이면 배울 수 있지만 예의작법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도학원에서는 박시몬·이병삼이나 러시아 무용수를 초청해 사교춤을 가르쳤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체육부는 1925년 무도과를 두고 강습회를 열었다. 백과사전은 서양문화에 대한 지향을 바탕으로 무도회가 사회 행사와 결합해 1930년대에도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당시 무도회에서는 대중이 즐기던 사교춤과 민속춤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 자료

AI 요약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무도회는 서양 사교춤이나 민속춤을 선보이는 공연이자 사람들이 모이는 회합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꼽은 최초의 공식 대형 무도회는 1905년 11월 6일 경성 청나라 공사관에서 열린 ‘무도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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