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1일 열린 제19회 반도체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사를 돌아볼 수 있는 수치가 나왔다.
올해 9월까지 반도체 수출은 3400억달러를 넘어섰다.
반도체의 날은 연간 수출이 처음 100억달러를 돌파한 1994년 10월 29일을 기념해 제정됐다.
당시 수출액은 이제 현재의 열흘 치에 해당한다.
산업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사건은 부도 위기에 놓인 기업에 이건희가 사재 50만달러를 투입한 일이었다.
1974년 초 설립된 한국반도체는 국내 첫 민간 웨이퍼 가공업체였지만 채 1년도 안 돼 자본잠식에 빠졌다.
당시 서른두 살이던 동양방송 이사 이건희는 그해 12월 지분 50%를 인수했다.
삼성 내부에서는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첨단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는 반대가 나왔다.
이건희는 오일쇼크를 겪으며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살길은 첨단 산업이라고 판단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한국반도체는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의 모태가 됐다.
원천 기술이 없던 삼성에 해외 전문가들은 가전용 비메모리나 조립·가공부터 시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건희는 대규모 설비로 원가를 낮춰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메모리 반도체를 택했다.
부친 이병철을 설득하려 자료를 모으고, 주말마다 일본 기술자를 초청해 기술을 익혔다.
지분 인수 8년 뒤인 1983년 2월 이병철이 반도체 진출을 공식 선언했고, 그해 12월 삼성은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다만 초기에는 칩 하나를 팔 때마다 1달러씩 손해를 봤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과정에서는 회로를 위로 쌓는 스택 방식과 기판을 파내는 트렌치 방식이 맞섰다.
이건희는 양산과 결함 수정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스택을 선택했다.
트렌치를 택한 일본 도시바가 수율 문제로 주춤한 사이 삼성은 생산성을 높여 D램 시장에서 앞서갔다.
삼성은 불황에도 설비 투자를 이어갔다.
1993년 경쟁사들이 부담을 느끼던 8인치 웨이퍼 라인을 도입했다.
생산량은 기존 6인치 라인의 두 배였고, 그해 10월 삼성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매출 1위에 올랐다.
2000년 닷컴버블 붕괴로 D램 가격이 폭락했을 때도 이건희는 세계 최초의 12인치 웨이퍼 전환을 서두르도록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