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 아파트의 탄생 배경, 철거민은 왜 입주하기 어려웠나

오늘도파이팅 2026/10/17
추천 0 비추 0 조회수 4513
내용 이해를 돕는 일러스트
내용 이해를 돕는 일러스트 · 소재: Microsoft Fluent Emoji

서울의 산비탈에 시민아파트가 들어선 배경에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주택난이 있었다. 서울 인구는 1954년 124만 명에서 1972년 600만 명으로 늘었다. 집이 모자라 도심 주변 산등성이와 빈 땅에 판자촌이 확산했고, 청계천·미아리·상계동 등의 주거 환경은 열악했다.

빈민을 외곽 정착촌으로 보내는 정책은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그쳤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6년 무허가 불량주택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불량주택 13만6650동에 서울 인구의 37%가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시는 1968년 12월 3일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발표해 1971년까지 한 동에 45가구가 사는 아파트 2000동을 짓고, 부족한 5만여 가구는 광주(성남) 대단지 등으로 이주시킨다는 구상을 내놨다.

금화아파트는 천연동·현저동의 불량주거지를 정비하고 철거민이 그 자리에 다시 살도록 하려는 사업이었다. 1968년 6월 착공해 1969년 4월 21일 준공한 단지는 19개 동, 855세대 규모였다. 서울시가 이 사업에서 자신감을 얻어 대규모 시민아파트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69년에는 서울 32개 지구에서 406개 동, 1만5840가구가 착공됐다. 다만 측량·지질 조사와 설계가 부족했고 공사 기간도 6개월 남짓이었다. 서울시 간부가 높은 곳에 짓는 이유를 묻자 시장이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고 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아파트는 정작 빈민이 입주하기 어려운 집이었다. 골조 위주로 지어진 건물에서 입주자는 전기·상하수도·부엌은 물론 계단과 옥상 난간까지 설치해야 했다. 여기에 분양가 원리금도 부담해야 해 철거민의 입주율은 낮았다. 분양권을 뜻하는 ‘딱지’는 전매 금지에도 거래가 성행했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뒤 금화아파트도 같은 달 20일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1979년까지 68개 동, 1684세대가 철거됐다. 재정착을 내건 사업이었지만, 주거비와 추가 공사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주민에게는 그 자리에 마련된 집조차 닿기 어려웠다.

AI 요약
서울의 산비탈에 시민아파트가 들어선 배경에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주택난이 있었다. 서울 인구는 1954년 124만 명에서 1972년 600만 명으로 늘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페이지
  • 0
  • 0
댓글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