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석전은 새해에 패수에서 열린 돌싸움으로 기록됐다. 이후 고려와 조선에도 이어졌지만, 열리는 시기와 쓰임은 달라졌다.
관련 기록에는 왕의 관람 행사와 군사 훈련, 지역의 세시 풍속으로 나타난 석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수서』 고구려조에 따르면 사람들은 정초에 패수, 곧 지금의 대동강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지고 서로 쫓았다.
국왕은 요여를 타고 와 이를 구경했다. 이 기록은 석전이 고구려에서 국가적 연중행사로 치러졌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는 석전 시기가 달라졌다.
『고려사』 신우 13년 5월조에는 왕이 연암에서 석전을 보고 다음 날에도 관람했다는 내용이 있어, 고려에는 단오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석전을 주로 담당하는 석투반과 석투군을 별도로 두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석전에는 망패·망팔매·줄팔매라 불리는 끈을 썼다.
돌을 끈 가운데에 얹고 한쪽 고리를 손가락에 건 뒤 돌리다가 끝을 놓아 날리는 도구였다.
조선에서는 석전이 군사적 목적으로도 활용됐다.
1419년 세종 1년에는 석전자발대를 모집하면서 천민에게는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고 양민에게는 관직에 임용될 기회를 주도록 했다.
1436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에게 석전군으로 야인을 방어하라고 명했다.
1508년 삼포왜변 때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 선수 수백 명이 왜인을 격파하는 데 동원됐다.
석전은 지역 풍속으로도 이어졌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안동과 김해에서 해마다 4월 8일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 연습하고, 단옷날에는 장정들이 편을 나눠 겨뤘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말 서울에서는 삼문 밖 사람들과 아현 사람들이 만리재에서 싸웠으며, 승리한 편에 따라 풍년이 들 지역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부상자가 생길 만큼 격렬해 당국이 금지하기도 했고, 각지의 연중행사로 이어지던 석전은 조선 말기까지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금지돼 오늘날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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