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석전, 한국에서는 시대별로 어떻게 달라졌나

월급관리중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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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석전 기록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 놀이의 양상이 드러난다.

두 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지는 집단 놀이였으며, 기록에는 왕실의 관람 행사이자 군사 훈련으로 활용된 모습과 지역 풍속으로 행해진 모습이 함께 나타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수서』의 고구려전이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패수, 곧 지금의 대동강 위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졌으며, 국왕도 요여를 타고 와 구경했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석전은 왕이 참석하는 연중행사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석전을 맡는 석투반과 석투군을 따로 두어 장려했다.

『고려사』 신우 13년 5월 기록에는 왕이 연암에서 석전을 구경하고 이튿날에도 관람했다고 나온다.

백과사전은 이를 고구려의 정초 행사와 달리 단오 무렵에 열린 사례로 설명한다. 석전은 전투 기술을 익히는 성격도 띠었다.

조선에서는 석전대를 모집하고 석전 인력을 방어와 전투에 활용한 사례가 확인된다.

1419년(세종 1) 세종은 태조 때 활동하던 석전대가 폐지된 일을 걱정해 지원자를 모집했다.

천민 지원자는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고 양민 지원자는 관직에 임용하도록 했다.

세종 3년 5월에는 병환 중인 태종이 석전을 구경했으며, 부상자에게 어의를 보내 치료하고 선수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1426년과 1427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관람을 청해 종루에서 이틀 동안 석전을 구경했다.

1436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에게 석전군으로 야인을 방어하라고 명했고, 1508년(중종 3) 삼포왜변 때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 선수 수백 명이 모집돼 왜인을 격파했다.

군사적 활용과 나란히 지역 풍속도 이어졌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안동과 김해에서 아이들이 4월 8일에 연습하고 단옷날에는 장정들이 편을 나눠 겨뤘다고 기록돼 있다.

18세기 말 서울에서는 삼문 밖 사람들과 아현 사람들이 만리재에서 맞붙었으며, 어느 편이 이기느냐에 따라 풍년이 들 지역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석전은 조선시대 말까지 여러 지방에서 행해졌지만 일제강점기에 금지됐고, 오늘날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참고 자료

AI 요약
한국의 석전 기록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 놀이의 양상이 드러난다. 두 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지는 집단 놀이였으며, 기록에는 왕실의 관람 행사이자 군사 훈련으로 활용된 모습과 지역 풍속으로 행해진 모습이 함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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