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은 어떻게 벌였고, 세종은 석전대 지원자에게 무엇을 제시했나

아직졸려24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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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石戰)은 음력 정월 대보름에 사람들이 편을 나눠 돌을 던지며 승부를 겨루던 성인 남성 놀이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석전이 무예를 익히고 전투를 연습하는 성격도 지녔다고 설명한다.

다만 세종대 석전대 모집과 신분별 혜택은 확인한 실록 검색 자료에서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지 못했으므로, 백과사전의 서술과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다.

놀이에서는 마을이나 지방 사람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들판에 모였다.

처음에는 수백 보 떨어져 돌을 던지고 점차 가까이 맞붙었으며, 패해 달아나는 편이 졌다.

망패·망팔매·줄팔매라 부르는 끈에 돌을 얹어 빙빙 돌리다가 한쪽 끝을 놓아 날려 보내기도 했다.

진을 짜고 며칠 동안 밀고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석전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서》 고구려전에는 새해마다 패수, 곧 지금의 대동강에서 두 편이 돌을 던지고 왕이 구경했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때는 석투반과 석투군을 두었고, 《고려사》에는 왕이 5월에 석전을 관람한 기록이 있어 고구려의 정초 행사와 시기가 달랐다.

조선 초에도 관심이 이어져 1426년과 1427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관람을 청했고, 이틀 동안 종루에 올라 석전을 구경했다.

석전의 사회적 의미와 위험성은 후대 기록에도 나타난다.

18세기 말 서울에서는 삼문 밖 사람들과 아현 사람들이 만리재에서 겨뤘으며, 어느 편이 이기느냐에 따라 경기도 또는 다른 지역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경도잡지는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일이 있었고, 당국이 놀이를 금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419년(세종 1) 4월 세종은 폐지된 석전대를 되살리려고 지원자를 모집하며 천민에게는 복호, 양민에게는 서용을 제시했다.

복호는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는 조치였고, 서용은 일정한 품급으로 임용하는 일이었다.

석전은 조선 말기까지 지방에서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에 금지돼 오늘날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참고 자료

AI 요약
석전(石戰)은 음력 정월 대보름에 사람들이 편을 나눠 돌을 던지며 승부를 겨루던 성인 남성 놀이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석전이 무예를 익히고 전투를 연습하는 성격도 지녔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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