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치 공간에서 우선 다뤄진 것은 조선 왕실의 복귀가 아니라 새 국가를 누가 어떤 체제로 세울 것인가였다. ‘해방후 아무도 왕정복고 논의를 안한 이유’라는 물음도 이 장면에서 출발한다. 왕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정복고는 독립·통일정부·토지와 생계 문제보다 앞서는 의제가 되지 못했다.

조선은 1910년 병합으로 국가 체제를 잃었고, 왕실은 식민지 통치 아래 정치적 기반을 빼앗긴 채 관리됐다. 고종은 1919년, 순종은 1926년 사망했으며,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도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해방 당시 왕실이 독자적으로 정치 세력을 조직하거나 국가 운영을 맡을 현실적 조건은 매우 약했다.
더 큰 흐름은 독립운동 진영이 오래전부터 공화국을 국가 형태로 내세웠다는 데 있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주국이 아닌 민주공화국을 표방했고, 해방 뒤 귀국한 정치 세력도 대체로 그 계승과 새 정부 수립을 놓고 경쟁했다. 왕실을 국가 정통성의 중심으로 되돌리는 구상은 이 흐름과 맞지 않았다.

해방정국은 미군정, 소련군정, 좌우 정치세력의 대립과 분단 위기가 겹친 시기였다. 정치적 논쟁은 신탁통치, 단독정부, 통일정부, 선거와 헌법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됐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국가 형태로 확정했다.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개인적 견해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진로를 좌우할 공론장의 주요 선택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해방 뒤 왕정복고가 중심 의제가 되지 못한 것은 왕실의 정치적 기반이 식민지 시기에 크게 약화됐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국가 구상이 이미 공화국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단과 정부 수립을 둘러싼 급박한 정치 환경 속에서 대한민국은 1948년 민주공화국 체제를 헌법으로 정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