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산으로 아이를 꺼내야 하지만 산모의 배와 자궁을 열어야 하는 순간, 1800년대까지 제왕절개 하면 산모가 100% 죽었다는 말은 이런 극단적인 수술 장면에서 나왔다. 당시 제왕절개는 살아 있는 산모를 안전하게 출산시키는 표준 치료라기보다, 다른 방법이 모두 실패한 뒤 택하는 최후의 시도에 가까웠다. 아이를 살릴 가능성을 붙드는 동안 산모는 출혈과 감염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다.

가장 큰 문제는 피를 멈추고 자궁을 제대로 봉합하는 기술이었다. 절개한 자궁은 강하게 수축하고 많은 혈관이 지나가는 부위인데, 오늘날처럼 확실히 봉합해 출혈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대량 출혈로 쇼크에 빠져도 수혈 체계는 없었고, 수술 뒤 복부 안에서 이어지는 출혈을 되돌릴 방법도 제한적이었다. 마취가 자리 잡기 전에는 극심한 통증과 몸의 반응 자체가 수술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

수술실 환경도 치명적이었다. 손, 기구, 실, 침상에 붙은 오염이 상처로 들어가도 세균의 존재와 감염 경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산욕열과 복막염이 생기면 항생제는 물론 효과적인 치료 수단이 없었다. 절개 부위를 봉합한 뒤에도 자궁 내부와 복강에서 감염이 번지기 쉬웠고, 살아서 수술을 마친 산모가 며칠 뒤 숨지는 일이 반복됐다.

다만 ‘100% 사망’은 역사적으로는 과장된 표현이다. 드물게 살아남은 사례는 있었고, 지역과 시기, 수술 방식에 따라 결과도 달랐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마취, 소독·무균 개념, 자궁 봉합술이 발전하고 출혈·감염 관리가 개선되기 전까지 산모 사망 위험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제왕절개가 오늘날처럼 산모와 아이를 함께 살리는 수술로 바뀐 핵심은 절개 자체가 아니라, 그 뒤의 지혈·봉합·감염 통제 기술이었다.
과거 제왕절개는 출혈을 멈추고 자궁을 봉합하기 어려웠으며, 마취·수혈·소독·항생제도 부족해 산모에게 매우 위험한 수술이었다. 산모가 ‘100%’ 사망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지만, 19세기 후반의 의료 혁신 이전에는 생존 사례가 예외적으로 여겨질 만큼 치명적이었다.
